◇101살 할아버지의 마지막 인사/벤자민 페렌츠, 나디아 코마미 지음·조연주 옮김/152쪽·1만3000원·양철북
웃어른을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윗사람은 덕담을 건넨다. 설 명절의 풍경이다. 설날은 지났지만 최근 독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책의 면모를 보면 세배하는 풍경이 떠오른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유대인 에디 제이쿠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동양북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김형석의 인생문답’(미류책방),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열림원) 등 인생 선배가 후배에게 지혜를 전하는 에세이가 인기다. 최근 비슷한 책이 한 권 더 출간됐다.
이 책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활동한 검사 벤자민 페렌츠의 삶과 사유를 담은 에세이다. 페렌츠는 1920년 지금은 사라진 나라인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 북서부 지방)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곧장 미국으로 건너간다. 나치가 저지를 범죄는 피했지만 그를 기다린 건 가난과 불확실한 미래. 맨몸으로 건너간 그의 가족은 범죄가 일상인 지역에 산다. 어린 시절 그의 주변에는 범법자가 많았지만 페렌츠는 결코 그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들어갈 시기를 놓쳤으나 총명한 그를 알아본 주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뉴욕시립대를 거쳐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간다. 그는 로스쿨에서 선악의 문제와 범죄에 관해 고민하며 범죄학을 공부했다. 학업 도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펜 대신 총을 잡았다. 로스쿨에서 범죄학을 연구한 이력과 전쟁 중 군에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검사로 일하게 된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인류사 최초로 전쟁범죄를 사법적으로 처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저자는 아우슈비츠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책에는 강제수용소 풍경이 등장한다. 독일이 항복하고 연합군이 수용소로 진주하자, 이곳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이 가해자였던 독일군을 집단 구타하고 산 채로 화로에 던져 넣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장면 앞에서 페렌츠는 폭력을 끊기 위해서는 사법 정의를 제대로 세우는 게 필요하다는 결심을 굳힌다.
손민규 예스24 인문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