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미래유산’ 지정된 서울 대장간 형제-불광-동명-동광 대장간… 서울시 “미래 세대에 전할 가치” 부자간-형제간 代이어 가업… 용도따라 맞춤형 제작해 인기 온라인 판매하자 매출 10% 늘어… 일부는 서울 밀려나 경기도 옮겨
지난달 25일 찾은 서울 은평구 형제대장간에서 56년 경력의 대장장이 류상준 씨(오른쪽)와 제자 박한준 씨가 달궈진 쇠에 메질을 하고 있다. 담금질과 메질을 수차례 반복하면 쇠는 더욱 단단해진다. 한때 을지로7가에만 70여 곳의 대장간이 모일 정도로 성업했던 대장간은 서울시내에 9곳만 남아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서울 대장간 지키는 무쇠 장인들
《망치가 ‘깡’ 소리를 내면 쇠는 식칼이 되고, 말뚝이 된다. 인공지능과 메타버스가 화두인 21세기 서울 에도 ‘손에 잡히는 연장’을 만들어내는 옛날 대장간이 남아 있다. 도시화의 풍파 속에서 자리를 지킨 서울 대장장이들을 만나봤다.》
지난달 25일 찾은 서울 은평구 수색동 ‘형제대장간’은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선 곳이었다. 대장간은 쇠를 두들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깡’ 하며 귀를 때리는 연장 소리가 무뎌질 때쯤이면 뜨거워진 얼굴이 이곳이 대장간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쇠를 달구고 녹일 때 쓰는 화덕의 불꽃이 33m²(10평) 남짓한 대장간을 열기로 채웠다. 크고 작은 망치와 모루(쇠를 얹어놓고 가공하는 받침대)뿐 아니라 정, 식칼 등 각종 연장이 대장간 안에 빼곡했다. 대장간 이름대로 경력 56년의 대장장이 류상준(68)·상남 씨(65) 형제가 함께 운영하는 이곳은 옛 대장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기자를 옆에서 지켜보던 상준 씨가 쇠꼬챙이를 다시 불이 타오르는 벽돌 화덕에 집어넣었다. 꼬챙이가 다시 붉게 달궈졌다. 땅땅땅, 이번에는 망치가 쇠를 정확히 때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달아오른 쇠가 떡처럼 구부러졌다. 텐트를 칠 때 고정하는 지팡이 모양으로 휜 말뚝이 금세 완성됐다. 상준 씨는 “가장 간단한 건데도 못 하겠느냐”며 기자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일흔이 다 된 나이가 무색하게 어깨가 다부졌다.
○열세 살 대장장이에서 시작된 ‘형제대장간’
서울시는 그중에서도 형제대장간과 은평구 불광대장간, 강동구 동명대장간, 동대문구 동광대장간까지 네 곳을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가치가 있다는 의미의 ‘서울미래유산’으로 삼았다. 전통이 있어 보존할 가치가 있는 곳들을 선별했다(이 중 동광대장간은 지난해 10월 경기 남양주시로 터전을 옮기면서 서울미래유산에서 제외됐다). 이 대장간에 대한 심층 보고서 ‘서울의 대장간’ 제작에 참여한 서울역사박물관 최보영 학예연구사는 “서울이 도시화되면서 소비 기능만 남았지만 대장간에는 아직 생산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며 “특히 서울 대장간은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도구 생산에 특화되는 등 농기구 중심의 지방 대장간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깊다”고 말했다.
형제대장간의 형제는 소 편자(발굽에 붙이는 ‘U’자 모양의 쇳조각)장이었던 아버지의 넷째와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손이 빨라 하루에 소 20마리에 편자를 달아주고 쌀 두 가마를 받는 ‘능력자’였다. 공부에 취미가 없던 형 상준 씨가 열세 살에 ‘대장장이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반대하다가 결국 “기술을 배우면 나중에 굶지는 않는다”며 허락했다.
상준 씨는 이웃집 아저씨였던 모래내대장간의 대장장이에게서 열세 살 때 일을 배우기 시작해 1996년 형제들이 모아준 3200만 원으로 지금의 형제대장간을 열었다. 동생 상남 씨는 2002년 이곳에 합류했다. 2001년 미아리 방천시장에서 4개월간 한 핫바 장사가 제법 잘됐지만, 가스 폭발 사고로 몸을 다쳤기 때문이다. 처음엔 주로 판매를 담당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웬만한 대장간 일을 전부 해낼 수 있는 형제대장간의 살림꾼이 됐다.
형제에게는 대장장이의 흔적이 있다. “이거 보름 정도 됐는데 아직 안 없어졌어요.” 상남 씨의 오른손 검지가 구부러지는 부분에 거뭇한 화상 자국이 보였다. 제품을 만들다가 무심코 옆에 있는 뜨거운 쇳덩이에 손을 갖다댔더니 껍데기가 홀랑 벗겨졌다. 불에 익숙한 대장장이들은 불이 붙으면 녹아서 살과 엉겨 붙는 합성섬유 대신 깔끔한 구멍이 나는 면 옷만 입는다. 불꽃에서 나오는 탄 먼지 때문에 안과에도 자주 간다.
○손수레에서 시작된 불광대장간
서울 은평구 불광대장간을 운영하는 아버지 박경원 씨(왼쪽)와 아들 상범 씨.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부엌칼, 캠핑도구처럼 개인의 수요가 많은 제품이나 호미, 낫처럼 간단한 소도구를 주로 다룬다. 아버지 박경원 씨(84)를 따라 1991년부터 불광대장간 일을 시작한 상범 씨(53)는 “온라인 판매를 도입하고는 전체 매출의 10% 정도는 오른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레트로 감성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온라인에서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고객층이 다양해지면서 부엌칼은 손님이 원하는 스타일에 맞춰 얇게 뽑는 등 디자인에도 신경을 쓴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에 적응하려는 불광대장간은 다름 아닌 ‘손수레’에서 시작됐다. 아버지 경원 씨는 1965년 서대문구 홍은동 일대에서 이동식 대장간을 시작했다. 이동식이지만 화덕과 탁상 드릴, 모루, 풀무(화덕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도구)를 모두 갖춰 안 되는 게 없었다. 1978년에 은평구 대조동에 있는 현재 자리에 문을 연 불광대장간은 2대째 영업 중이다.
역사가 60여 년인 만큼 오래된 손님도 많다. 칼을 하나 사가면 20∼30년은 너끈히 쓰니 자주 새것을 구매하지는 못하지만, 이곳을 잊지는 않는다. 올해 설날 직전 강동구에서 오신 한 어르신 손님은 두 아들과 고명딸에게 선물하려 부엌칼 세트 세 개를 사갔다. 손님은 “불광대장간 제품을 써보고 좋게 느껴서 아들딸에게도 주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상범 씨는 이처럼 어머니 아버지가 단골집을 물려주는 광경을 볼 때면 보람이 커진다.
○밀려나는 서울 대장간
서울 동대문구 동광대장간 앞에 선 2대 창업자 이일웅 씨. 동광대장간은 재개발에 밀려 지난해 10월 경기 남양주시로 이전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입주 초기 공업, 제조업 등 1, 2층 저층 상가들만 있었던 대장간 인근에는 고층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소음이 많은 대장간 특성상 옆에 식당이나 주택가가 있으면 영업이 곤란하다. 2020년 작고한 창업주 이흔집 씨의 뒤를 이어 동광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 일웅 씨(44)는 “민원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남양주 땅을 사서 들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 동명대장간 주인 강영기 씨가 낫을 만들기 위해 쇠를 다듬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설 자리는 좁아지고 있지만, 동명대장간의 자신감은 여전하다. 아파트 공사 현장 같은 건설업부터 작은 소도구를 찾는 개인까지 ‘좋은 제품’을 찾는 수요는 꾸준하기 때문이다. 큰 공사 현장에서는 돌을 다듬거나 쫄 때 쓰는 정을 많게는 300∼400개씩 주문한다.
○미래를 기약하는 ‘제자들’
형제대장간은 대장간의 미래를 담보할 제자를 키워내고 있다. 다른 대장간이 대를 이어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이제는 서울 시내에 대장간이 있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전히 어떤 청년들은 대장간에 매료된다.
스물여덟 살이었던 2015년 형제대장간에 합류한 박한준 씨(35)는 이제 형제대장간의 어엿한 ‘후계자’다. 중앙대 컴퓨터공학과를 나와 프로그래머를 꿈꾸던 그는 라디오에서 우연히 대장간 일을 접한 뒤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몇 개월이고 선배 대장장이들이 일하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박 씨는 이제 웬만한 물건은 다 만들 줄 안다. 박 씨는 “실력만 좋으면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대장장이의 매력인 것 같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분야니까 열심히만 하면 길이 열릴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