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생의 ‘문과 침공’ 현실로
최예나 정책사회부 기자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표를 받은 뒤 모의지원을 해봤더니 인문계열로 교차 지원하면 ‘대학 레벨’이 오르더라고요. 입학 뒤에 자연계열로 전과할 수도 있다고 하니 교차 지원하기로 했어요.” 2022학년도 대학입시 정시모집에서 동국대 법학과에 합격한 이과생 A 씨 이야기다. 당초 수의대에 가고 싶었지만 수능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입시 기관의 정시 모의지원 서비스에서 교차 지원을 해 본 결과 이공계열로 지원할 때보다 학생들 사이에서 말하는 대학의 ‘등급’이 두 단계 정도 올랐다. A 씨는 “자연계열 전과가 어렵지 않다고 해서 나중에 컴퓨터 관련 전공으로 바꿀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각 대학의 정시 1차 합격자 발표가 마무리된 가운데 이과 수험생의 인문계열 교차 지원 사례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 2022학년도 수능부터 문·이과 통합형으로 바뀌면서 수학 영역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이과 수험생들이 교차 지원을 통해 상대적으로 혜택을 봤다. 기존 수능 체제에서는 유례가 없던 일이다 보니 입시계에서는 ‘이과생의 문과 침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2023학년도 대입에서 이런 점을 공략하는 수험생들이 늘어날 것이란 예상이 벌써부터 나온다.
○ 교차 지원 이과생, 상위권 대학 인문계열로
13일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2학년도 정시에서 이과 수험생이 교차 지원을 통해 대학 레벨을 서울 중위권 대학에서 상위권 대학으로, 지방 대학에서 수도권 대학으로 높여 합격한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백분위 277.0점을 받은 한 수험생은 건국대 화학과 등에 지원하는 대신 연세대 중어중문학과에 합격했다. 282.5점으로 고려대 통계학과에 합격한 수험생은 서울시립대 컴퓨터과학부에 지원 가능한 수준이었다. 한국외국어대(글로벌) 통계학과 등에 지원 가능했지만, 춘천교대 초등교육과에 합격한 사례도 있었다.
인문계열과 자연계열로 나눠 뽑는 간호학과에 인문계열로 지원해 합격한 이과생도 있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동일한 경희대 간호학과라도 합격선은 인문계열(265점)과 자연계열(279점) 사이에 14점 벌어진다. 중앙대 간호학과 역시 계열 간 9점 차이가 난다. 두 곳 모두 인문계열로 지원해 합격한 이과생이 있었다.
교차 지원에 성공한 수험생들은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는데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숙명여대 경영학부에 합격한 이과생 수험생 B 씨는 “수험생 때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수능 성적표를 받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교차 지원하면 대학이 바뀌니 학과보다 대학 이름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 수학 점수 차이가 문·이과 희비 갈라
이런 상황에서 특히 수학은 문과생이 불리하게 됐다. 2021학년도까지는 문과생과 이과생이 각각 수학 ‘나’형과 ‘가’형이라는 다른 문제지를 풀고 성적도 따로 산출했다. 반면 2022학년도부터는 문·이과 수험생 모두 1∼22번까지 공통과목, 23∼30번까지는 ‘확률과 통계’ ‘미적분’ ‘기하’ 중 하나를 푼 뒤 성적이 함께 나오게 바뀌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선택과목에 따른 유불리를 없애겠다며 선택과목 응시 집단별 공통과목 점수를 고려해 선택과목 점수를 조정했다. 그러나 이과생은 문과생보다 공통과목과 선택과목 점수가 모두 좋다 보니 등급도, 표준점수도 우위를 차지했다. 평가원이 선택과목 집단별 점수를 공개하지 않아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지만 종로학원의 자체 표본조사에 따르면 수능 수학에서 1등급과 2등급을 차지한 이과생 비율은 각각 86.0%, 79.7%였다. 표준점수 최고점 역시 ‘미적분’과 ‘기하’는 모두 147점, ‘확률과 통계’ 선택자는 144점으로 문과생이 불리했다. 수학 점수 차이로 인해 인문계열 주요 학과의 합격선은 전반적으로 전년도에 비해 하락하고, 자연계열 학과 합격선은 올랐다.
○ 적성·복수전공 가능성 고려해 신중히 결정해야
교차 지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우연철 진학사 입시전략연구소장은 “입학 후 복수전공을 하려 할 때 인원을 제한하거나 평점 등으로 지원 장벽을 두는 대학도 있으므로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만기 유웨이 교육평가연구소장 역시 “이과생의 교차 지원은 적성이나 흥미에 따른 게 아니고 평판도 높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므로 입학 뒤 반수나 자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과생들이 수학에서 불리하다는 점이 이번 수능으로 증명되면서 재수생과 고3이 되는 재학생 가운데 수학 선택과목을 ‘미적분’으로 변경하려는 경우도 있다. 수능이 1년도 안 남은 시점에서 굉장한 모험이지만, 문과생의 수학 점수가 워낙 불리해지자 이런 결정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임 대표는 “3월에 첫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르고 선택과목별 점수 추정치가 나오면 학원에서 ‘미적분’ 단기 완성반이 많이 개설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예나 정책사회부 기자 ye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