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파 스님의 ‘반구대 암각화’(2021년), 목판 위에 나전 옻칠 채색, 4×7m. 스님은 이제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 힘들어진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를 여러 옻칠 기법을 통해 화려한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위 사진). 해당 작품은 옻칠을 해서 물에 담가도 변형되지 않기 때문에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 꼭대기에 있는 장경각의 연못 속에 전시돼 있다. 통도사 서운암 제공
윤범모 미술평론가
“국제적으로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는 화가는 누구인가요?”
“차이는 있지만, 빈센트 반 고흐라든가, 피카소 같은 스타 화가의 작품이 비싸게 팔립니다.”
“그럼, 피카소 그림이 비를 맞았다면 어떻게 되는가요?”
“그렇지. 그런데 내 그림은 일년 내내 물속에 넣어놔도 끄떡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옻칠 그림이기 때문이지요. 옻칠!”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 꼭대기에 장경각이 있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의 목판을 도자(陶瓷) 16만 장으로 구워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영구적으로 대장경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다. 이곳은 풍광이 수려해 영취산 정상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정말 영산(靈山) 같다. 높은 산을 즐기려면 맞은편의 작은 산에 올라야 한다. 영취산 정기를 느끼려면 서운암 장경각에 오르면 좋다. 구름이나 안개라도 낀 날은 글자 그대로 한 폭의 산수화가 눈앞에 펼쳐진다.
‘반구대’라고 알려진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의 바위그림은 한국 미술사의 지평을 넓혀준 획기적인 문화재다. 1971년 크리스마스 날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이 발견한 이래 선사시대 미술로 주목을 받았다. 암각화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더불어 한반도의 미술사와 생활문화사의 상한연대를 화려하게 올려주면서, 그 수준을 세계에 자랑하게 했다. 반구대는 태화강 절벽의 평평한 바위 위, 그러니까 높이 약 3m에 길이 9m 규모에 새긴 암각화다(국보 제285호). 바위에 새긴 그림은 사람과 동물 등 약 200점이나 된다. 그림 대부분은 고래, 물개, 거북과 같은 해양 동물, 호랑이, 사슴, 멧돼지 같은 육지 짐승이다. 더불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도 그려져 주술적인 장면 혹은 사냥 등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래 그림만 해도 우선 다양한 종류와 더불어 특징을 묘사한 기법 등이 눈길을 끈다. 이 그림들은 뾰족한 못 같은 도구로 면 쪼기(面刻畵·면각화) 혹은 선 쪼기(線刻畵·선각화) 기법을 활용해 새겼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조성됐을 것이다. 암각화 공간은 종교적 의례용으로 상징적 성역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행복한 삶을 위한 염원의 장소일 수도 있다. 사냥에 나가거나 풍요로움을 기원할 때 마을 사람들이 모였던 장소일는지도 모른다.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태화강 상류의 천전리 암각화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다.
성파 스님은 독보적 존재다. 사경, 서예, 천연염색, 전통 종이 만들기, 도자 불상과 대장경판, 건칠 불상, 채색 불화, 수묵 산수화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연구해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전통 방식으로 길이 100m의 닥지 종이를 제작했다. 종이 한 장의 길이가 물경 100m! 이는 기네스북감이지 않은가. 야생화가 만발하는 매년 봄마다 서운암 산자락에 펼쳐지는 천연염색 축제는 장관을 이룬다. 수천 개의 전통 옹기 항아리가 펼쳐져 있는 서운암 경내는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되기도 한다. 근래 스님은 옻칠 작업과 제자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옻이라는 재료는 어떤 물질도 다 수용하기 때문에 그림 재료로도 훌륭하다. 한마디로 어떤 색깔이라도 다 만들 수 있다. 내구성 강한 재료로 각광을 받고 있어, 옻칠 작가가 날로 늘고 있는 추세다.
스님은 왜 옻칠과 같은 전통문화에 심혈을 기울였을까. 무엇보다 한국 전통문화의 보존과 올바른 계승 때문이다. 거기다 시대 환경에 맞게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작가적 역량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는 이른바 ‘민화’ 미술관이기도 하다. 수백 년 전의 목조건물 벽면에 행복 주제의 채색 길상화(吉祥畵)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가람에서 스님은 수행의 또 다른 방편으로 미술을 선택했다. 미술작업은 포교 차원에서도 훌륭한 분야다. 오늘날 한국 불교계는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조계종은 성파 스님을 종정 스님으로 옹립했다. 올봄에 공식 취임하는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은 한국불교의 최고 어른으로 상징적 지도자가 됐다. 그런 스님의 미술 불사(佛事)는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한다.
스님은 이른바 민화라는 용어 대신 ‘한국화’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채색 전통의 보고(寶庫)로 사찰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불화와 단청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심지어 전통민화의 작가는 대부분 사찰의 화승(畵僧)이라면서 구체적 사례를 들기도 한다. 한마디로 채색 전통화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시킨 곳은 사찰이었고, 이를 오늘날 후세에 넘겨야 할 의무 또한 사찰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옻칠 반구대 작업은 상상 밖의 쾌거라 할 수 있다. 이런 작품을 미술관으로 옮겨 전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품을 세워 설치하고 폭포처럼 물줄기를 내리게 한다면, 이는 훌륭한 포토존이 될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 화려한 색깔로 치장해 우리 시대에 새롭게 탄생했다.
윤범모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