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 주연 배우 레이디 가가(파트리치아 역)가 파티를 즐기고 있다. 필자의 ‘10초 건너뛰기’ 중독 증세를 일시적으로 치료해준 영화다.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손효주 문화부 기자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 상영 중인 한 영화관. 관객석에서 필자는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자세 고쳐 앉기를 거듭하는 등 몇 차례 안절부절못했다.
스크린에선 넷플릭스의 ‘마이네임’이 상영되고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린 이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리즈가 초청된 건 처음. 스크린 한가운데 떠오른 넷플릭스의 ‘N’은 기성 영화계를 향해 “세상은 OTT가 점령했다”라고 선포하는 듯했다. 그러나 영화와 시리즈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벅차오른 것도 잠시, 곧 초조해지고 말았다.
경찰 역할의 한소희가 차량을 운전해 경찰서로 돌아오는 장면이 문제였다. 운전 장면과 그가 경찰서 복도를 걷는 장면 등이 대사 없이 약 50초간 이어졌다. 10초, 20초…. 차오르는 시간과 함께 ‘이상한 욕구’가 턱 끝까지 차올랐으니, 그것은 마법의 버튼 ‘10초 건너뛰기’를 누르고 싶다는 욕구였다.
OTT는 시청 편의를 제공하고 콘텐츠 소비를 촉진할 목적 등으로 10초 건너뛰기 기능을 도입했다. 이 기능은 고속재생 기능과 상승 효과를 내며 시청 형태의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인터넷엔 8시간이 넘는 10부작 시리즈를 두 기능을 활용해 4시간 만에 주파했다는 식의 ‘속도전 무용담’이 넘친다.
이런 시청 형태가 병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단 몇 초의 지루함도 참지 못하는 증세는 강박증이 결합된 성인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와 유사하다는 것. 그러나 이를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MZ세대의 ‘행위 중독’ 탓으로만 돌려야 할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생각해 보면 필자도 이 기능에 거의 손대지 않고 본 작품들이 있다.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징어게임’이다. 몰입도를 높이는 세트와 음악, 공감 가는 스토리, 배우들의 열연까지…. 대사 없이 흘러가는 여백도 밀도 있었다.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도 그랬다. 러닝타임이 158분으로 길었지만 꼼꼼히 채운 서사와 레이디 가가, 알 파치노 등의 신들린 연기 덕에 건너뛰기를 못 누른다는 초조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실화가 바탕인 만큼 결말을 알고 봤음에도 아는 결말마저 궁금하게 만드는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연출력은 감탄스러웠다.
좀비 떼 액션은 행위예술을 방불케 했지만 공간만 달리해 반복을 거듭한 탓에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안 봐도 되는 ‘피 튀기는 여백’이 됐다. 학생 9명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사연을 늘어놓는 장면 등 ‘병렬식 사연 배틀 구조’는 드라마를 ‘신파 백화점’으로 만들어버렸다. 신파1 건너뛰기, 신파2 건너뛰기…. 마침내 12부작 마침표를 찍었을 때 밀려온 것은 ‘미션 클리어’의 성취감이었나, 피로감이었나.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꽉 찬 대사만이 ‘신기능’의 사용을 막는 건 아니다. 고전이 된 유지태 이영애 주연의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는 뻔한 연애가 소재인 데다 천천히 흘러간다. 대사도 적고, 대나무 숲 같은 자연만 구도를 달리해 보여주는 장면도 많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의 눈빛 등 섬세한 심리 묘사가 여백을 바닥부터 밀도 있게 채운다. 여백조차 몰입하게 되는 이유다.
일부 창작자들은 두 기능이 작품성을 훼손한다고 반발한다. 그러나 쓰라고 만든 기능을 창작자의 노고에 예우를 다하겠다며 쓰지 않을 이유는 없다. 사실 어떤 콘텐츠는 세계 상위권에 오르는 데 있어 만듦새보다는 참신한 소재와 더불어 신기능 덕을 봤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같은 기능이 있어 지루한 콘텐츠도 끝까지 보는 이들이 많다.
중요한 건 시청 자율성 과잉의 시대에도 자율성을 반납하게 만드는 양질의 콘텐츠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MZ세대는 조금의 지루함도 못 참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신기능의 영향으로 냉정해진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영화관에서마저 OTT 시청 습관이 불쑥 튀어나오는 세상에서 신기능 사용 욕구를 잠재울 작품을 만드는 건 온전히 창작자의 몫이다. 분산되고 결핍된 주의력을 온전한 몰입으로 바꿔줄 콘텐츠가 더 많이 나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