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고고학계에 한 획을 그은 1970년대 바르나 발굴 현장. 사진 출처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최근 ‘플렉스(Flex)’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자신의 여력을 끌어모아 마련한 사치품을 다른 사람에게 한껏 과시하는 것을 뜻한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처럼 보이지만 사실 플렉스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무덤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황금으로 온몸을 치장해 플렉스를 실현한 최초의 인류는 놀랍게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같은 문명과 멀리 떨어진 불가리아에서 발견됐다. 신석기시대에 문명의 변방에서 살다 간 이 황금인간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포클레인 삽날 끝에 걸린 황금
불가리아라면 대부분 요구르트와 장수 음식, 그리고 TV 속 아름다운 자연 정도를 떠올릴 것 같다. 실제 러시아와 비슷한 슬라브계와 튀르크계가 연합해 만든 흑해 연안의 이 나라는 세계 4대 문명에 들지 않을뿐더러 스톤헨지 같은 유명한 유적도 없다.
휴양 도시인 바르나주의 주도 바르나는 불가리아에서도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 도시는 1949년에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맞아 ‘스탈린’으로 도시 이름이 바뀐 아픈 현대사도 품고 있다. 그리고 50년 전에는 세계 최초의 황금인간이 이곳에서 발견되면서 유명해졌다.
성기에도 황금 덮개 씌워
포클레인 기사가 우연히 발견한 6500년 전 불가리아 바르나 공동묘지에선 무덤 300기와 황금 유물이 발굴됐다. 특히 43호 무덤에선 온몸을 황금으로 치장한 일명 ‘황금인간’이 발견되면서 바르나 문명이 재조명됐다. 그는 당시 부족 지도자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 믿기 어려운 사실을 두고 고고학자들은 수십 년간 온갖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검증을 거듭했다. 하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우리나라 강동구 암사동에서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6500년 전 불가리아에서는 이미 황금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바르나의 무덤 가운데 43호 무덤의 주인공은 샤먼 또는 족장으로 추정된다. 온몸을 금으로 두른 그의 무덤에서만 모두 1000여 점의 황금이 나왔다. 흥미롭게도 그는 성기도 마치 콘돔 같은 황금 덮개로 덮여 있었다. 조상을 뜻하는 한자 조(祖)도 남성의 성기 모양에서 기원한 점을 고려하면 성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대를 잇는 상징적인 힘을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상교역으로 쌓은 부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든다. 과연 석기시대 도구를 사용하던 바르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황금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걸까. 그리고 그 엄청난 비용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바르나의 황금은 지금 시각으로 봐도 순도가 아주 높다. 이런 황금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를 내는 화덕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빵을 굽고 토기를 굽는 화덕을 사용하고 있었다. 즉, 높은 온도를 내는 기술은 빙하기 이후 마을을 일구고 살던 신석기시대 마을 대부분이 갖고 있었다. 금속이나 유리를 만드는 기술도 높은 온도를 내는 화덕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신석기시대에서 황금이나 청동을 많이 만들지 못한 이유는 비용 때문이다. 광석을 채굴하고 높은 온도의 화덕에 필요한 연료 등에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그러니 고대 신석기시대인들이 황금이나 청동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들 쉽게 만들어내긴 어려웠던 것이다.
바르나 유적지에서 나온 황금 그릇, 장신구, 도끼 등. 사진 출처 Armburster·Dmitrinov
남는 것은 해골과 황금뿐
바르나 묘지에서 발굴된 인간 머리 점토 유물. 실제 크기와 비슷하게 제작됐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같은 슈퍼리치들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천문학적 돈을 투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남는 것은 해골뿐이다. 영원한 것은 황금이지 인간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여 황금을 쌓아 놓은들 결국 우리는 한 줌의 재가 될 것이다. 운이 좋아 봐야 바르나의 황금인간처럼 우리가 걸친 황금이 미래 박물관의 전시품이 될 뿐이다. 우리에게 약속된 행복은 내 손에 걸친 황금이 아니라는 것이야말로 6500년 전 최초의 황금인간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아닐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