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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민심 잡고 조상의 뿌리 찾으리라”… 태종 이방원의 ‘고향행차’

입력 | 2022-02-19 03:00:00

[여행이야기]조선왕조의 본향 전주
태종, 조선 임금 유일 전주 방문… 이성계의 대권 꿈 시작된 곳
한 해 1000만명 찾았던 한옥마을… 시선 잡아끄는 자만벽화마을



태조로(가운데 길)를 중심으로 600여 동의 한옥이 들어선 전주한옥마을. 이 일대는 경기전, 오목대 및 이목대 등 조선의 뿌리와 관련 있는 유적들이 많이 있다.


《조선 27대 왕들 중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이는 아무도 없다.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는 점 외에는, 전주와 특별한 연결고리를 가진 왕도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왕들은 전주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함흥 출생의 태종과 한양 출생의 세종은 공개석상에서 전주가 고향임을 애써 밝혔다. 최근 TV 사극으로 주목받고 있는 태종 이방원은 왕의 신분으로 전주를 방문한 유일한 군주이기도 했다. 태종의 자취를 좇아 풍패지향(제왕의 고향)인 전주를 찾았다.》






○사냥 핑계 대고 전주 찾은 이방원

1413년 10월 1일, 한양에서 출발한 태종의 어가는 마침내 완산성(전주성)에 도착했다. 그가 임금에 오른 지 13년 만의 일이자, 조선 임금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향을 방문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전주는 한양에서 직선거리로 500리(약 20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임금이 순행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거리다. 게다가 전주는 태종으로서는 정치적 부담감을 안고 있는 곳이다. 태종은 ‘왕자의 난’ 등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반대편에 섰던 전주의 유력 가문들을 제거했다. 호남 출신 개국공신인 심효생(부유 심씨), 오몽을(보성 오씨), 이백유(완산 이씨) 등 쟁쟁한 인물들이 당시 죽임을 당했다.

태종은 이후 정권이 안정되자 전주의 민심을 달랠 필요를 느꼈다. 전주는 전국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한 호남의 수부(首府)다. 전남북과 제주도까지 관할하는 전라감영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태종은 이런 전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족 세력과의 화해가 정국 운영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은 “태종은 전주 사족과 정적(政敵) 관계인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전주를 전격 방문했다”며 “호남 민심을 수습하는 의미와 함께 자신의 뿌리를 찾아 후손의 예를 다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에서의 태종은 매우 인자한 군왕이었다. 임금을 맞이하는 예법과 절차에 하자가 발생했어도 관련자들을 꾸짖거나 벌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만 일을 잘해도 상을 내리고 칭찬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전주에서 벗어나자마자 엄격한 군왕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귀향 도중 임금이 사용하는 말인 내구마가 경기도 탄천교에서 물에 떨어져 즉사한 사건이 생기자, 책임자(광주판관)에게 80대 장형(杖刑) 및 파면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전주에서 대권 꿈 키운 이성계

강력한 카리스마의 절대군주 태종마저 겸허하게 만든 전주는 사실상 조선의 원류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건국주 태조 이성계와 그 직계 선조들의 자취가 이곳에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기(王氣)를 느껴보는 여행 시작점으로는 이목대(전북도기념물 제16호)가 의미가 있다. 이목대는 자만벽화마을로 유명한 교동 초입에 세워진 작은 비각을 가리킨다. 이 일대가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李翰) 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이성계의 4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도 이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관원과의 불화를 겪어 강원도, 함경도 등지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이목대 비석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라는 고종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고종은 외세의 침탈로 혼란스럽던 시기인 1900년에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정통성을 표방하기 위해 조선의 뿌리인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자만벽화마을에 묘사된 조선 마지막 왕자 이우(李씚)의 모습.

전주 이씨들의 근거지였던 자만벽화마을에서는 골목골목마다 새겨진 다양한 벽화를 구경하는 즐거움과 함께 조선 왕실과 관련한 흔적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바로 ‘자만동 금표(禁標)’다. 고종은 이목대를 설치하면서 이곳을 성역화하기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자만동 금표가 있는 담장에는 고종의 손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자인 이우를 묘사한 그림과 함께 ‘피우지 못한 오얏꽃’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다. 조선 왕가를 상징하는 오얏꽃(자두꽃)이 결실을 맺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가 ‘대풍가’를 불러 대권의 꿈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곳으로 전해지는 오목대. 이곳에서는 전주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벽화마을의 이목대에서 도로(기린대로) 건너편을 바라보면 오목대가 보인다. 배나무가 많았다는 이목대와 오동나무가 많았다는 오목대는 원래 하나의 산줄기로 이어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 1930년대 일제가 산허리를 잘라 철로를 깔면서 두 곳을 분리시켜 버렸다. 현재 도로로 차단된 두 곳은 길 위에 설치된 높은 구름다리로 오갈 수 있다.

오목대 역시 태조 이성계와 관련 있는 유적지다. 태조가 잠시 머문 곳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필 비문 등 역사적 기록들이 이곳에 남아 있다.

전주의 상징인 풍남문. 전주성 문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문이다.

전하는 내용은 대강 이렇다. 고려 우왕 때인 1380년 전북 남원 황산벌에서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가던 도중 선조들의 고향인 전주 오목대에 들렀다. 그는 이곳에 남아 있던 친지들을 불러 모은 뒤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면서 잔치를 베풀었다. 대풍가는 중국 한나라 건국주 유방이 자신의 고향인 패현(沛縣) 풍읍(豊邑)에서 천하 패권을 꿈꾸며 불렀다는 노래다. 그러니 이성계가 이 노래를 부른 건 자신 역시 고향에서 대권의 꿈을 노골적으로 밝혔다는 의미다. 그가 고려를 전복하려는 위화도 회군을 하기 8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전주에는 한나라 황제 유방과 관련된 글자들이 유독 많다. 전주의 상징인 풍남문의 풍(豊), 서문이었던 패서문의 패(沛) 등이 그러하다.

○백제의 궁성지와 전주한옥마을

한복 차림으로 전주한옥마을을 여유롭게 즐기는 관광객들.

전주 이씨들의 자취가 밴 이목대와 오목대를 보고 나면 본격적으로 전주한옥마을을 둘러볼 차례다. 전주한옥마을은 오목대에서 풍남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태조로’를 중심으로 600여 동의 한옥이 들어선 형태다.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한 해 1000만 명이 넘게 찾는 관광명소였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된 경기전 내 정전.

한옥마을의 구심점은 경기전이다. 1410년 태종이 자기 손으로 지었으면서도 끝내 참배하지 못했던 경기전은 입구의 하마비부터 눈길을 끈다. 사자 두 마리가 비석을 좌우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전국 각지의 하마비 중 유일한 지정문화재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마비로 꼽힌다. 경기전 내부에는 이성계의 초상화(국보 제317호)를 모신 정전을 비롯해 전주 이씨 시조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 왕들의 어진과 의장물을 전시한 어진박물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태를 묻은 태실 등 여러 유적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경기전이 있는 이곳에 한옥마을이 들어서게 된 것도 사연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일제가 도로를 넓히기 위해 전주성 성벽을 허물어뜨리면서 일본 상인들이 이 일대 상권까지 장악하게 됐다. 이에 전주의 뜻있는 유지들이 조선의 뿌리까지 침범해 오는 일본인들을 막고자 한옥을 짓고 마을을 건설했다고 한다.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전동성당.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로 유명하다.

경기전을 나서면 그 맞은편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인 순교 성지로 유명한 전동성당을 비롯해 풍남문, 전주 객사인 풍패지관, 전라감영 등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들러볼 만하다.

한편 기린봉 자락이 뻗어 내려온 곳에 위치한 오목대와 전주한옥마을 등 주변 지역은 후백제 도읍지와 중첩되는 곳이기도 하다. 900년 견훤이 전주에 세웠던 후백제 왕도의 진산은 기린봉이었고, 견훤 시기에 쌓은 산성이 발견되기도 했다. 견훤이 머물렀던 왕궁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밝혀져 있지 않다. 분명한 건 전주가 한 왕조를 창업해낼 정도로 지기가 왕성한 도시라는 점이다.





글·사진 전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