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동화마을 / 2018년 12월
이라크 구자라트. 바벨탑의 모티브가 된 건축물. / 브리태니커 홈페이지
멕시코 마야문명 피라미드 / 멕시코 관광청 홈페이지
최초의 계단은 신전 제단으로 오르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걸어 오르는, 올려다봐야 하는 높은 길. 계단의 끝 제단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이 대중들을 내려다 봤을 것이고요. 남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서 동물을 죽여 피를 흘리고 태워 제사를 지냈겠지요. 계단은 처음부터 권력이 새겨진 시설물이었습니다. 좌우대칭이 완벽한 직선형태라면 더 권위적으로 보입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 2022년 2월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절대 신성권력이 없던 한반도에선 계단이 많지 않았습니다. 중동이나 마야문명처럼 계단이 긴 돌 건축물을 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리는 수평으로 단절돼 있는 지점을 잇습니다. 계단은 위 아래로 떨어진 관계를 연결합니다. 청운교 백운교는 계단인데도 이름은 ‘다리(橋)’입니다. 수직적 의미보다 수평적 의미가 강한 것입니다. 계단을 올라야 대웅전으로 갈 수 있으니 불국정토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데도 이를 위아래로 나누는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수평 이동의 개념입니다. 게다가 두 ‘다리’는 대칭도 아닙니다. 비정형이죠. 권위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계단에서 그다지 권위를 찾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길고 권위적인 돌계단이 생긴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입니다.
서울 남산의 돌계단 / 동아일보DB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포스터.
촬영지가 경북 포항 구룡포인데요, 남녀 주인공들이 자주 만나는 이 계단도 직선입니다. 생김새와 위치로 보아 일제 강점기 때 신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
계단이 곡선이라면 더 낭만적인 공간으로 느껴지나 봅니다. 둥글고 구부러진 계단은 안식의 장소로 인식됩니다. 서구권도 그런 것 같은데요,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또를 먹던 스페인 광장 계단은 직선형태인데도 폭이 넓어 ‘광장(Piazza)’으로 불리는데다 아래에서 보면 윗부분이 두 갈래로 나뉘어 보이기 때문에 곡선처럼 느껴집니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요즘엔 계단에 앉아 있는 것이 금지됐다고 합니다./ AP뉴시스
우리나라에서 계단은 6.25 이후 많이 생겼습니다. 주로 달동네에서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도시로 몰려든 피난민과 이주민들이 시내 주변 언덕과 산에 자리를 잡으며 계단이 생활 속에 많이 생겼지요. 당연히 계획적인 직선보다는 구불구불한 모양이 많았습니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 나오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납득이 계단’.
미성숙한 젊은이의 고루한 생활 공간인 동시에 친구와의 추억이 서린 장소로 소환되죠. 골목 짜투리 계단이 친구와의 아지트로 변주됩니다. 공공장소인데도요.
서울 중구 을지로 ‘커피한약방’ / 2022년 2월
우리가 누굽니까. 해학과 낭만의 민족 아닙니까. 가장 권위적이라는 법원의 계단마저 드라마에선 변호사 주인공이 멋짐을 뿜어내는 배경일 뿐입니다.
2020년 10월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