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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올림픽을 순수해야만 한다고 했나”[장환수의 수(數)포츠]

입력 | 2022-02-21 18:00:00

|올림픽의 사회학…국가주의와 시장경제의 좌우 합작품




기원전 9세기부터 약 1200년간 지속된 고대 올림피아 제전은 그리스 서부 올림피아에서 4년에 한 번, 닷새간 열렸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의 달력이 오차가 심해 4년마다 표준시를 다시 정했는데 이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기념해 대회를 개최했다. 제전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대회였다. 노예가 아닌 남자만 참가가 가능했다. 예술, 종교를 집대성한 헬레니즘 문화의 결정체란 평가가 있는 반면 뇌물과 반칙이 횡행하는 정치판, 선전판, 도박판으로 변질돼 간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를 지배한 로마의 네로 황제는 경기를 조작해 승리를 휩쓸었다는 기록이 있다. 승자는 영웅이 됐지만 패자는 상대 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죽음 또는 그에 상응하는 모욕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올림픽을 부활시켰을 때 올림픽은 승패보다 참가에 의의가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세계인의 관심사가 된 올림픽을 주위에서 그대로 놔둘 리가 있나. 20세기 들어 애국심으로 포장한 국가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든 상업성이 어우러지면서 근대 올림픽 역시 급변하고 있다.

2022년 2월 20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겨울올림픽 폐회식 불꽃놀이 행사 중 오륜 모양의 불꽃이 하늘에 수놓이고 있다. 베이징=뉴스1


▶2022년 베이징 겨울 올림픽이 20일 끝났다. 중국 베이징은 여름(2008년)과 겨울 올림픽을 모두 치른 세계 최초의 도시가 됐다. 하지만 홈 텃세, 편파 판정, 약물 의혹, 운영 미숙, 적자 누적, 코로나19가 어우러진 최악의 올림픽이란 불명예도 안게 됐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겨울 올림픽의 특성상 대회가 열리는 것조차 몰랐던 많은 사람들이 쇼트트랙 판정 시비와 피겨 1인자 카밀라 발리예바(러시아)의 약물 의혹 등이 제기되면서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일명 국뽕으로 불리는 국가주의는 낡은 이념이라곤 하지만 여전히 위력적이라는 게 다시 증명된 셈이다.

국뽕은 우리나라에서도 올림픽 붐을 일으키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 지난해 도쿄 여름 올림픽에 비해 코로나 상황이 훨씬 위중함에도 중국에는 이상하리만치 호의적이던 여론은 쇼트트랙 판정시비가 생기자 비로소 공격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러시아로 귀화했다가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기술코치를 맡은 안현수와 김선태 감독은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들은 중국으로부터는 기대한 만큼 성적이 안 나오자 한국인 코치가 적절했느냐는 자질 시비의 이중고를 겪었다.

안현수(왼쪽)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기술코치와 김선태 중국대표팀 감독. 모두 대한민국 출신이다. 베이징=원대연 기자 yeon@donga.com


▶한국 선수단은 이유야 어찌됐든 이번 올림픽에서 근래 보기 드문 낙제점을 받았다. 금메달 2개, 은 5개, 동 2개로 종합 14위. 겨울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기 시작한 최근 30년간 9번의 대회 중 가장 낮은 순위이다. 메달의 편중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쇼트트랙과 스피드 스케이팅 외엔 노 메달이다. 홈 어드밴티지가 있긴 했어도 직전 대회인 2018년 평창(7위·금 5개, 은 8개, 동 4개)에선 스켈레톤, 봅슬레이, 스노보드의 설상종목에서 사상 첫 메달을 획득했다. 컬링, 스피드 추월, 매스스타트에서도 시상대에 섰다. ‘피겨 여왕’ 김연아는 2010년 캐나다 밴쿠버(금)와 2014년 러시아 소치(은)에서 2회 연속 메달리스트가 됐다.

한국은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대회부터 겨울 올림픽에 선수단(임원 1명,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4명)을 파견했다. 첫 메달을 획득한 것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 대회.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쇼트트랙에서 금 2개, 스피드에서 꿈에 그리던 메달(은 1개, 동 1개)을 수확했다. 순위는 10위.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올림픽 정신을 앞세우는 국제올림픽위원회올림픽(IOC)는 공식적으로는 국가별 메달 집계를 하지 않는다. 국가간 지나친 경쟁과 금메달 지상주의를 완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IOC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버젓이 메달 순위가 노출돼 있다. 우리가 보통 쓰는 금메달 순위가 먼저 나오고, 클릭 한 번 하면 합계 메달 순위로 바뀐다.

중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 순으로 따지면 3위(금 9개, 은 4개, 동 2개)에 올랐지만 합계 메달로는 11위(15개)로 순위가 떨어진다. 어느 올림픽이든 대체로 주최국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반대로 러시아올림픽위원회는 9위(금 6개, 은 12개, 동 14개)에서 2위(32개)로 점프한다. 일본은 12위(금 3개, 은 6개, 동 9개)에서 6위(18개)로 상승. 선수층이 두텁고, 각 종목을 골고루 잘하는 국가들이다. 한국은 금메달과 합계 순위 모두 14위.

▶올림픽은 종목별 메달 숫자의 편중이 너무 심하다는 지적도 받아왔다.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는 19세이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8개 종목에 출전해 금 6개, 동 2개를 따냈다. 어느 나라든 펠프스 한 명만 보유하면 바로 톱10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까지 4번의 올림픽에서 무려 28개의 메달(금 23개, 은 3개, 동 2개)을 수집했다.

이번 대회에선 메달 5관왕이 바이애슬론에서 2명, 크로스컨트리에서 1명 나왔다. 금메달 3관왕 이상은 스피드스케이팅 1명을 포함해 5명이었다. 모두 98명이 2개 이상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은 쇼트트랙 최민정(금 1개, 은 2개)과 황대헌(금 1개, 은 1개)이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예전에 비하면 적은 숫자다.

베이징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준결선 경기에서 역주하는 최민정.(맨 왼쪽) 베이징=원대연 기자 yeon@donga.com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과 메달 수 배정은 국력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수영 육상과 바이애슬론 크로스컨트리 같은 기록경기는 거리별로 메달이 세분화돼 있고 계주 같은 단체전까지 있어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메달을 차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종목들이 하나같이 유럽과 미국을 위한 스포츠란 점이다. 20세기 후반 들어 IOC가 아시아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유도 태권도 쇼트트랙 야구 등이 정식종목에 합류하긴 했다. 그러나 태권도 유도 같은 격투기는 한 명이 체급별로 1개의 메달밖에 가져갈 수 없다. 태권도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종주국의 위력이 반감된 상태. 판정 시비가 잦은 쇼트트랙은 승부에 변수가 많아 절대 강자가 나오기 힘들다. 양궁은 메달 수가 남녀 단체전까지 6개에 불과하다.

베이징 겨울올림픽 컬링에 출전한 ‘팀 킴’ 선수들이 작전 회의를 하는 모습. 이번 대회에서 여자 컬링은 한 팀이 최소 9경기 이상을 치러야 했지만 금메달은 단 한 개에 불과하다. 베이징=원대연 기자 yeon@donga.com


▶메달을 많이 땄다고 늘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인간 탄환’ 우사인 볼트(자메이카)는 펠프스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 볼트는 올림픽 메달이 8개(모두 금메달)이지만 2008년 베이징부터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까지 100m와 200m를 사상 첫 3회 연속 제패했고, 400m 계주에선 2회 연속 우승컵을 안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오직 1개의 금메달만 걸려 있는 아이스하키와 농구 축구 야구 등 구기종목의 가치도 이에 못지않다.

국내에선 한국과 러시아 국적으로 8개의 메달을 딴 안현수(금 6개, 동 2개)나 ‘쇼트트랙 여왕’ 전이경(금 4개, 동 1개)보다 김연아, 황영조(1992년 바르셀로나 마라톤 금메달), 박태환(2008년 베이징 수영 자유형 400m 금메달)이 훨씬 큰 돈방석에 앉았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겨울 올림픽은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처음 열렸다. 당시엔 야외경기뿐이었고 참가 선수도 16개국 258명에 불과했다. 이후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실내에서도 경기를 할 수 있게 됐고, 규모가 커진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대회부터는 여름 올림픽과 2년 간격으로 열리게 됐다. 이와 함께 월드컵(1930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과 아시아경기(1951년 인도 뉴델리)도 여름 올림픽을 피해 개최 시기를 잡는 과정에서 겨울 올림픽과 같은 해에 열리게 됐다.

올해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스포츠대회 빅4 가운데 3개가 동시에 열리는 해다. 베이징 겨울 올림픽에 이어 9월 중국 항저우 여름 아시아경기, 11월 카타르 월드컵이 잇달아 개최된다. 스포츠 기자들이 4년마다 가장 바쁜 한 해다.

▶기자는 1997년 무주·전주 겨울 유니버시아드를 시작으로 98년 나가노 겨울 올림픽, 99년 강원 겨울 아시아경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5년 마카오 동아시아경기를 모두 팀장으로 현지 취재했다. 써놓고 보니 참 많이 다녔다. IOC 총회도 세 번 다녀왔다. 러시아 모스크바(2001년)에선 유색인종 최초 IOC 위원장에 도전한 김운용의 좌절을 경험했다. 체코 프라하(2003년)와 과테말라시티(2007년) 총회에선 평창의 겨울 올림픽 유치 실패를 맛봤다.

스포츠로 풍월 좀 읊었다는 점에서 감히 말한다면 스포츠라고 굳이 독야청청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스포츠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어우러진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국뽕과 상업성이 절대선은 아니지만 절대악도 아니다. 반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한국계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여름과 겨울 통틀어 올림픽 최다 메달리스트인 안현수와 베트남 축구 영웅 박항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태권도 사범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한국계 골퍼 케빈 나, 미셸 위, 리디아 고의 우승에 많은 이는 열광한다.

피겨 프리프로그램에서 스스로 무너져 다 잡은 금메달을 놓친 16세 소녀 발리예바를 호되게 질책한 예테리 투트베리제 코치의 매서운 눈매가 잊히지 않는다. 외국 언론에선 그를 아예 마녀라고 표현했지만 어찌 보면 그야말로 진정한 올림피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