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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대와 물감과의 전쟁”… 87세 노화가의 끝나지 않은 실험

입력 | 2022-02-22 03:00:00

국내 1세대 단색화가 하종현, 내달까지 국제갤러리서 개인전
캔버스 대신 마대-나뭇조각 이용… 평면 작업에 생생한 물성 표현



하종현의 ‘이후 접합’ 연작 중 ‘Post-Conjunction 21-301’(2021년·왼쪽 사진)과 ‘Post-Conjunction 21-201’(2021년). 캔버스 틀에 나뭇조각들을 끼워 넣으면서 조각적인 입체성을 부여했다. 국제갤러리제공


결핍은 생각지 못한 돌파구를 만든다. 국내 1세대 단색화가 하종현(87) 역시 그랬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홍익대 재학 시절부터 캔버스는 그에겐 버거운 재료였다. 비싼 캔버스를 대신할 것을 찾던 그는 남대문시장에서 천을 사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등 나름의 대안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건 쌀 포대로 쓰던 마대였다. 그는 마대 뒷면에 물감을 칠해봤다. 올이 촘촘하지 못하다 보니 물감이 앞으로 밀려 나왔다. 앞면에서 본 물감의 흔적은 마치 또 하나의 그림 같았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배압법’. 1974년부터 하종현이 본격적으로 사용한 이 기법은 “엉뚱한 짓을 많이 했다”고 자평하던 그의 일생의 결실이 됐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하종현 개인전에서는 배압법과 같은 그의 독특한 작업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장에 펼쳐진 작품 39점은 모두 전형적인 회화 기법으로 그리지 않았다. 작품 곳곳에선 노화백의 도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배압법으로 만든 작품은 ‘접합(Conjunction)’ 시리즈로 불린다. 단순히 추상화라 칭할 수 없을 정도로, 평면 작업임에도 생생한 물성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그가 “마대와 물감과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듯 그의 작품은 작가가 들인 노동의 양과 시간을 유추하게 만든다. 하종현은 앞면으로 빠져나온 물감을 펴 바르거나 그 위에 다른 색을 덧칠하면서 여러 표현법을 꾀했다. 전시 출품작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인 ‘Conjunction 95-020’(1995년)과 비교해 보면 ‘Conjunction 21-82’(2021년)를 포함해 최근작의 색이 밝아진 것도 알 수 있다.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70대에 들어 나뭇조각을 겹쳐 만든 작품 시리즈인 ‘이후 접합’에 도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후 접합’ 15점을 선보인다. ‘이후 접합’ 작업은 얇게 자른 나뭇조각에 먹이나 물감을 칠한 캔버스 천을 감싸는 것부터 시작된다. 한 나뭇조각을 놓고 옆 가장자리에 물감을 짠 다음 다른 나뭇조각을 이어 붙이는 식이다. 이때 나뭇조각 사이로 물감이 눌리며 스며 나와 조각적인 요소가 부각됐다.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에 따라 작품의 이미지는 크게 달라진다. ‘Post-Conjunction 21-307’(2021년)처럼 물감을 긁어 파편처럼 표현함으로써 역동성을 살릴 수도 있고, ‘Post-Conjunction 21-201’(2021년)처럼 푸른색을 덧칠하며 정적인 정서와 리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3월 13일까지.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