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노조 파업 숨은 문제점 고용부-법원 모두 애매한 판단… 법에 따라 택배기사 신분 변해 기사들, 사업자 혜택 누리면서, 걸핏하면 “근로자” 배송 거부 쟁의권 기간-방식 제한도 없어… 업계 “선 넘는 파업행위 막아야”
택배노조의 신분은 법에 따라, 또 필요에 따라 개인사업자와 근로자를 오간다. 이렇게 불명확한 신분이 택배업계의 혼란과 피해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뉴스 1
변종국 산업1부 기자
《“택배기사들은 노동자가 아닙니다. 개인사업자들입니다.”
김슬기 비노조 택배기사 연합회 대표(CJ대한통운 택배기사)가 지난달 23일 열린 택배노조 파업 규탄 집회에서 한 말이다. 김 대표는 “개인사업자는 노조를 할 수가 없는데 택배노조가 웬 말이냐”고 반문하면서 “온전한 개인사업자로 돌아가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길 희망한다”고 했다. 이어 “노조를 결성할 수 없는 개인사업자들에게 노조 지위를 주면서부터 택배 현장에서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택배노조 자체는 해체돼야 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의 연설은 비노조 택배기사들과 택배 대리점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택배업계에서는 택배 노조가 필요에 따라 근로자 지위와 개인사업자 지위를 넘나들면서 권리만 누리고 있다는 점에 불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김 대표가 택배업계의 오랜 논쟁거리를 수면으로 끌어올려 놓은 셈이다.》
○택배기사는 “근로자” vs “개인사업자”
2017년 고용노동부는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택배노조) 설립을 승인했다. 고용부는 택배기사가 △사측이 정한 배송 절차와 요금에 따라 지정된 구역에서 화물을 배송하는 점 △사측이 작성한 업무 매뉴얼에 따라 일하는 점 △택배회사와 대리점의 지휘, 감독을 받는 점 등을 근거로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봤다.
택배회사들과 대리점주들은 즉각 반발했다. 택배기사들은 근로자성이 없는 개인사업자들이기에 노조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법원에도 택배기사들이 근로자가 맞는지 판단을 요청했다. 원청과 대리점주들은 택배기사가 △배송구역이라는 독점적인 영업권을 가지고 있는 점 △택배기사가 제3자를 고용할 수 있는 점 △권리금을 받고 배송 구역 거래를 할 수 있는 점 △개별 영업활동에 따라 수익이 달라지는 점 등으로 볼 때 ‘일한 만큼 돈을 버는’ 개인사업자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입장이었다.
2018년 서울행정법원은 고용부의 손을 들어줬다. “택배기사는 노조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시한 것이다. 택배회사들은 이후 사실상 법적 다툼을 중단했다. 당시 소송을 자문했던 한 법조인은 “친노동 판결이 잇따라 나오는 분위기였고, 고용부 판단 이후 노조와 이미 교섭을 진행 중인 대리점들도 있어서 소송에 따른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법에 따라 택배기사의 신분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고용부와 법원 모두 노조법상으로는 택배기사를 근로자로 인정했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아니라고 봤다. 고용부는 2017년 당시 “택배기사가 노조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만 판단했다”고 했다. 행정법원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어도 노동권이 필요할 경우 노조를 설립할 수 있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한 노동 전문가는 “노조법과 근로기준법의 입법 취지가 다르기 때문에 근로자에 대한 판단이 달랐다”며 “택배기사들에게 노동3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는지를 주로 다뤘기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선 깊이 논의하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택배기사가 근로자가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완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은 것이다. 그사이 택배노조는 조합원 7000명 정도를 보유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택배노조원은 전체 택배기사의 10% 미만이다. 그러나 노조 가입률이 높은 지역의 경우 이들의 파업에 따른 물류 차질이 생긴다. 한 택배업계 관계자는 “택배노조는 근로자도 되고, 사업자도 된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다. 택배노조가 누릴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 법으로는 제어가 안 되는 상황마저 오게 됐다”고 했다.
○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택배노조
택배업계는 택배노조가 너무 쉽게 쟁의권(파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소연한다. 교섭 당사자인 대리점주와 대리점 소속 택배노조 사이의 교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노조는 곧바로 중앙노동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한다. 중노위가 조정에 실패하면 노조는 쟁의권을 얻는다. 이 과정이 너무 쉽다는 얘기다. 한 대리점주는 “수수료 계약을 갑자기 바꾸자고 하거나 근무 시간을 바꿔달라고 하는 등 수용 불가능한 요구를 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바로 쟁의권을 얻는 게 수순”이라고 했다.
배송 거부를 막을 방법도 없다. 전국택배대리점연합회 관계자는 “배송 거부를 하는 노조원에게 배송 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 해지를 통보하면 노조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노조 와해 시도’라며 항의한다”며 “대리점마다 통일된 의견을 낼 수도 없고 교섭 능력도 각기 달라 노조가 있는 대리점은 1년 내내 노사 갈등이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오죽했으면 대리점주들이 택배 현장을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까지 하겠느냐”며 “노조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파업을 막는 제한 장치는 없다”고 비판했다.
○ 또 다른 피해자, 비노조 택배기사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고용부는 택배노조 조합원으로부터 폭언과 욕설을 들었다며 비노조 택배기사 A 씨가 낸 진정에 대해 “직장 내 괴롭힘이 맞지만, 택배기사는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괴롭힘 방지 조항을 적용할 수 없다”고 결론 냈다. 택배기사는 택배 대리점과 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라 근로자에게만 해당되는 근로기준법 76조의 직장 내 괴롭힘 처벌 조항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되면 회사는 문제가 되는 근로자를 징계하거나 근무 장소 변경, 피해자로부터 분리 또는 격리 조치 등을 할 수 있다. A 씨는 “택배노조에게 쟁의권을 줄 때는 근로자라고 하고, 비노조원들이 직장 내 괴롭힘 조항을 적용받으려 하면 개인사업자라고 보는 건 모순”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택배노조가 파업을 하면서 개인사업자에게 지원되는 코로나 소상공인 지원금을 받았다는 의혹도 있다. 비노조 택배기사 연합회 측은 “택배노조 일부가 개인사업자에게 해당되는 국가 대출인 코로나19 소상공인 방역지원금을 받고 있다”며 “유리할 땐 사업자, 불리하면 노동자라고 하는 양면성”이라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택배노조 지위에 대한 일관성 있는 법률 해석과 함께 택배노조의 선을 넘는 파업 등을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경기 남부의 한 대리점주는 “급하게 노조 필증을 만들어 주다 보니 모순적이고 납득이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며 “택배 노조를 제어하지 못하면 국민 생활과 밀접한 물류서비스 산업이 1년 내내 파업으로 멍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변종국 산업1부 기자 bj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