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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J “푸틴, 수백년 동안 쇠락한 러 위상 되돌리려 하지만 불가능”

입력 | 2022-02-22 10:52:00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반군 장악지역의 독립을 승인하고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러시아군 파병을 지시한 뒤 전세계의 이목이 우크라이나 동부에 쏠려 있다. 그러나 푸틴의 야심은 이 지역을 크게 넘어서며 냉전 종식 이후 질서를 재협상하길 원하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푸틴이 냉전 이후 유럽 안보 지도를 다시 그리길 원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푸틴은 이날 “러시아는 자국 안보를 위해 보복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과 유럽의 러시아에 대접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1시간에 걸친 연설에서 푸틴은 자신의 미래 구상을 조목조목 밝혔다.

푸틴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확장이 속임수이며 약속 위반이라면서 러시아 안보를 침해하는 나토 확장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나토가 동유럽에 진출하기 전인 1990년대 수준으로 물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틴은 1991년 소련 붕괴가 낳은 안보 상황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 푸틴은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악의 재앙”이라고 했다. 이 같은 인식은 푸틴이 1990년대 직접 목격한 현상의 반영이다. 소련 제국의 붕괴, 극심한 경제난 때문에 서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 극도의 내정 혼란과 서방의 냉전 승리 구가가 그것이다. 푸틴은 국가보안국(KGB) 요원으로 독일 드레스덴에 주재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소련 붕괴 직전에 귀국했다.

존스 홉킨스대학교 메리 새로트 역사학 교수는 푸틴이 러시아 주변에 소련 시절 때처럼 안보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힘으로 러시아를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 지위로 복귀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푸틴은 나토 회원국을 넘어 미국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를 포함한 초강대국들이 세계 질서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에게 나토는 곧 미국이다. 소련 시절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나토 회원국들은 주도권이 없다. 따라서 러시아가 소련 시절처럼 자기 영역을 장악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트럼프 정부 때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유럽 및 러시아 담당 국장이던 피오나 힐은 “러시아는 강제력을 갖기를 원한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직접 요구하는 것은 없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나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지난 7월 러시아 언론에 공개된 장문의 글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은 같은 사람이며 모두 9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옛 러시아에서 유래했다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가 러시아 도시의 모태라고 썼다.

힐은 “푸틴으로선 지난 30년간의 역사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소련, 러시아 제국을 약화시킨 수백년의 역사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 주 뮌헨에서 역사가로서 푸틴이 물러설 여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숄츠 총리는 그러나 “유럽의 안보를 보장하는 유일한 원칙은 국경을 현재대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전현직 서방 당국자들이 1990년대 미국과 유럽국들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허술하게 다뤘으며 냉전 승리의 도취감이 심했다고 말한다.

또 유럽의 안보 조약을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소련 시대 체결된 안보조약들 상당수에 대해 서방과 소련 양측이 서로 위반했다고 비난하면서 무효화된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러시아를 대화 상대로 삼아야 하지만 푸틴 생각처럼 시계를 되돌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소련이 붕괴할 당시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였던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1990년대 서방의 외교가 교만하고 무능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중이지만, 그렇다고 푸틴이 전쟁을 벌이겠다고 위협해도 좋다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1994년 러시아는 미국, 영국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 현재의 국경을 존중”하고 “무력사용 또는 위협을 자제”하기로 약속하는 안보보장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는 물론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에 가입하지 않도록 미국에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또 1997년 이후 나토에 가입한 과거 소련 연방 회원국들의 탈퇴와 유럽내 미 핵무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어떤 미국 대통령도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미 상원이 그런 조약을 비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요구흘 하고 있다. 또 나토에 가입한 나라들도 절대 탈퇴하지 않을 것이다.

푸틴은 독일 통일 당시 서방이 러시아를 속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1997년 러시아-나토 기본조약 협상 과정도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인들은 1990년 독일 통일 협상에서 미국과 서방 정치인들과 당국자들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나토가 동진(東進)하지 않을 것으로 약속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 나토가 1997년 당시의 나토 동쪽 경계선을 넘어 군대를 배치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고 말한다.

새로트 교수는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이 1990년 NATO가 동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음을 확인했다. 1997년 나토는 소련 국경으로 군대를 이동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선언이 법적 구속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새로트 교수는 “1인치도 안간다”는 제목의 책에서 1990년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동독 주둔 소련군 철수를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썼다. 당신이 독일을 놔주고 우리가 NATO가 “현재의 자리에서 동쪽으로 단 1인치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도 러시아를 방문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나토가 동진으로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발언을 하면서 공식화한 적은 없었다. 당시 조지 H.W. 부시 미 대통령이 나토가 동독을 포함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1990년 독일 통일 협정은 NATO의 동독 진출을 명시하고 있다.

푸틴은 예전에도 벼랑끝 전술을 선보인 적이 있다. 2008년 조지아 침공과 2014년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 사례다. 브레이스웨이스트는 “푸틴은 언제 멈춰야할 지를 정확히 알았으며 두 번 모두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번에 푸틴은 판돈을 크게 올렸으며 예전과 같은 손쉬운 탈출구는 없다.

군대를 철수하면서 서방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미국이 유럽 안보에 대해 대화하기로 약속했음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안보조약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체면이 손상되게 된다.

반대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위험도 커진다. 서방의 군사 분석가들은 러시아 군대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러시아에 적대적인 우크라이나 주민들을 장기적으로 굴복하도록 만드는 일은 악몽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영토 안으로 러시아 군대를 한발짝만 들여 놓더라도, 예컨대 크림반도에서 우크라이나 본토로 가는 다리를 건설하기만 해도 서방은 강력한 제재를 가할 것이다. 이는 2024년 대선에서 푸틴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푸틴은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동안 갈수록 대통령궁에 고립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이 일을 벌여야 할 때라고 결심한 듯하지만 군사 행동이 계획한 대로 진행되는 일은 드물다.

브레이스웨이트는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들어 푸틴을 비꼬았다. “푸틴은 1989년과 1990년 대처 총리가 그랬듯이 정치적 감각을 잃은 것 같다. 언제 멈춰야 할지를 아는 본능이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