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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 생일엔 ‘올 블랙’을[패션 데이/문정희]

입력 | 2022-02-23 03:00:00

문정희 시인


40세가 되던 생일날, 나는 검정 옷을 입고 부산 바닷가에 있었다. 조금 쓸쓸하고 심지어 막막한 기분이었다. 마흔 살은 인생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십은 불혹이라지만 사방에 혹!혹! 미혹들이 구멍을 뚫어놓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미혹들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뿐 여전히 실수하고 두려워하고 허둥거렸다. 말하자면 젊은 것이었다.

조각가 K 선생의 부산행에 대뜸 동행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뉴욕에서 오래 공부하고 돌아온 그녀는 한 건물의 실내 벽면 조각을 맡았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그 벽면 조각을 보고 짧은 글을 써달라고 했다.

조각 작품은 세라믹을 구워서 붙인 것으로 어떤 부분은 돌출 부분이 난해했고 어떤 부분은 깨진 조각도 섞여 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나는 문득 인생을 생각했다. 벽면 조각을 둘러본 후 바닷가를 걷다가 나는 K 선생에게 말했다.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마흔 살 생일요.” 그녀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마흔 살? 그럼 ‘언덕 넘어가기(Over the hill)’ 파티를 해야지.”

미국 여자들은 40세가 되는 생일에는 검정 옷을 입고 흑장미를 꽂고 장송곡을 들으며 축하한다고 했다. 장례식이 아니라 생일날 검정 옷이라니? 나는 내가 입은 반팔 검정 니트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허리에는 밧줄처럼 꼬아 만든 과장되게 굵은 검정 벨트까지 매고 있었다. “지금 그 검정 패션은 40세 생일 파티 옷으로 참 좋아요.”

K 선생은 연주자가 있는 카페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이윽고 장송곡을 들었다. 느리고 뭉클하게 퍼지는 음률 속에서 기실 좀 훌쩍거리고 싶었지만 오히려 무언가가 맑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검정 반팔 드레스를 입고 흑장미를 가슴에 꽂고 듣는 마흔 살의 장송곡은 지나간 젊음을 향한 만가(輓歌)라기보다는 뜨거운 방황과 서투른 열정에 대한 이별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진정한 어른으로 태어나는 순간 같기도 했다.

오롯이 나 자신으로 일어서야지, 무엇보다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제 사랑에 못 박히는 것조차 슬며시 바람결에 맡기고 나는 나를 살아야지’ 하는 대목에 생각이 미치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창밖으로 출렁이는 바다가 보였다. 햇살에 그을린 가로수들이 제멋대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자연의 이치가 와락 전신으로 밀려들었다.

지금도 그날, 마흔 살 생일에 입은 반팔 검정 드레스를 신비한 벽화처럼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검은색을 즐기는 까마귀족이다. 풋풋하고 발랄한 색들을 다 떠나보내고 자신의 힘과 에너지를 매장한 광맥처럼 빛나는 색이라고나 할까.


문정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