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적 시험에 서울과 지방 불평등 심화 부모 소득 차이가 자녀 학력 격차로도 연결 교육 공정 위해 입시 대학 자율에 맡겨야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지난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은 세계가 경탄하는 발전을 이루었다. 이제 매우 어려웠던 지난날의 삶은 까맣게 잊혀졌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을 회고하면 당시 젊은이들은 겨우 3∼4% 정도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사회가 급속히 발전하며 더 많은 대졸 인력이 요구된 것은 당연하다. 대졸자들은 좋은 일자리와 경제적 보상을 얻었고, 따라서 학력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도 생겨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에 진학했다.
그 결과 이제는 청년 대부분이 대학에 입학하는 고등교육 보편사회가 됐다. 실제로 2021년에 우리 청년층(25∼34세)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7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여러 국가 중 단연 1위였다. OECD 국가 평균인 45%를 크게 앞서는 수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 사회는 과거에 비해 불평등이 오히려 더 심화된 듯싶다. 여러 측면에서 골 깊은 양극화에 이르렀고 이로 인한 갈등은 사회 안정까지 위협하고 있다.
원론적으로는 젊은이 모두를 위한 좋은 일자리를 만들면 해결되는 문제다. 고졸과 대졸 간의 임금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너무 당연하다. 그리고 대졸자 비율도 낮아지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고학력 사회로 진입했으며, 이는 비가역적 변화로 믿어진다. 앞으로도 70% 정도의 고교 졸업생들은 계속 대학에 진학할 것으로 믿어지기에, 학력과 일자리의 부정합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입시도 사회 불평등을 적지 않게 조장하고 있다.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전국은 소위 일일생활권이 됐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정부는 전국의 대입 수험생 모두를 모아서 한 번에 치르는 필기시험을 도입했다. 수험생들이 자신의 점수를 다른 학생들과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대학 선택은 소위 간판과 연계됐다. 대학이 본격적으로 서열화됐고 수험생들은 서울로 몰리며 지역의 명문대학은 빛을 잃었다.
선진국이란 지역에 일류대학이 존재하는 나라다. 그러나 전국적이며 획일적인 수능에 의해 대한민국에서는 지역 대학들이 한결같이 황폐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서울과 지역 간의 불평등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수능은 부모의 소득 격차를 자녀의 학력 격차로 연결시키면서 불평등이 세대를 잇고 있다. 변별력을 위해 배배 꼬인 문제들로 가득한 것이 수능이다. 시간을 많이 들여 반복 학습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험이다.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최근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소득 상위 20% 가구의 평균 자녀 사교육비는 87만 원에 이르렀지만, 하위 20% 가구는 11만 원에 그쳤다. 상위계층 자녀의 평균 수능 성적이 월등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와 비슷한 전국적 시험, 즉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을 치르고 있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소득 20만 달러 이상의 부잣집 가정 자녀는 5명 중 한 명이 1600점 만점에 1400점 이상 받는다. 그러나 연소득 2만 달러 이하의 가난한 가정 출신은 50명 중 한 명만이 여기에 들어간다.
결국 수능을 중시한다면 이는 불우한 자녀들에겐 공정하지도 않으며 불평등이 세습되는 일이다. 유수 대학들은 마땅히 저소득층 학생들을 더 많이 선발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에서는 시카고대, 캘리포니아대 등 많은 대학이 SAT 성적을 아예 입학사정에 고려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는 대학에 이런 자율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안타깝다. 대입에 대해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후보 모두 “수능 비중을 더 늘리겠다”고 언급했다. 공정을 가장 중하게 내세우는 후보들이지만 수능이 지닌 근본적 문제점은 간과하는 듯싶다. 일자리를 기업에 맡기듯 대학입시는 대학에 맡기면 된다. 대학에 자율을 허락하는 새 정부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