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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인데 가격 안 오른 제품 없어”… 日 소비자 비명

입력 | 2022-02-24 03:00:00

[글로벌 현장을 가다]



19일 일본 도쿄의 한 슈퍼마켓에서 모자를 쓴 여성이 두 개의 샐러드드레싱을 들고 가격을 비교하고 있다. 엔 약세, 유가 상승 등으로 지난해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일본의 소비자물가가 5개월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소비자 부담이 커지고 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박형준 도쿄 특파원


《19일 일본 도쿄 미나토구의 대형 슈퍼마켓을 찾았다. 70대로 보이는 여성이 1L짜리 샐러드드레싱 2개를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둘 중 100엔(약 1050원)이 싼 430엔짜리 참깨 드레싱을 골랐다며 “요즘 가격이 안 오른 제품이 없다”고 했다.》






마트 내 채소 판매대 분위기도 썰렁했다. 특히 피망, 오이, 가지 등 여름 채소를 판매하는 곳은 고객 발길이 더 뜸했다. 난방에 사용하는 중유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이들 제품의 가격이 급등한 탓이다. 피망 값은 지난해 12월 초보다 두 배 이상 올랐다.

가격은 그대로 두되 양을 줄이는 ‘꼼수 인상’도 횡행하고 있다. 유명 식품기업 가루비는 지난달부터 감자스낵 용량을 2∼5g 줄여 판매하고 있다. 일본햄 역시 이달 1일부터 피자 무게를 줄였다. 아지노모토는 조만간 일부 커피 제품의 양을 줄이기로 했다.

이 같은 물가 상승세는 1990년대 초 거품 경제가 붕괴한 후 30년 넘게 저성장, 저물가가 고착화한 일본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올해 일본 소비자물가가 연 2.0% 가까이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경제 성장에 따른 물가 상승이 아니라 엔 약세와 유가 상승에 의한 부분이 커 국민들은 달갑지 않은 표정이 역력하다. 월급은 그대로여서 가뜩이나 얇은 지갑이 더 얇아졌다는 이유다. 교도통신이 19, 20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7%는 “물가 상승으로 생활에 타격이 있다”고 했다.

엔 실질 가치 50년 최저

총무성이 발표한 1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 1월보다 0.5% 올랐다.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9월부터 5개월 연속 오름세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공급망 교란 등으로 미국의 1월 소비자물가는 1982년 이후 40년 최고치인 7.5% 상승을 기록했다. 한국의 1월 물가 또한 3.6%였다. 이를 감안하면 0.5%라는 수치가 높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연간 기준으로 마이너스(―) 물가 상승을 심심찮게 겪었던 일본인에게는 월 0.5% 상승이란 수치가 상당히 높게 느껴진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던 2011년 일본 소비자물가는 0.3% 하락했다. 이후 2016년(―0.1%), 2021년(―0.2%)에도 마이너스 상승이 나타났고 2012년과 2020년에는 물가 상승률이 직전 해와 똑같은 0.0%였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꼽힌다. 우선 엔 약세다.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2년간 풀린 막대한 유동성의 후폭풍을 수습하기 위해 다음 달부터 기준금리 인상에 나설 뜻을 밝혔다. 금리 인상으로 미 달러 가치가 상승할 것이 예상되면서 달러 대비 엔 가치는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엔 약세로 수입 물가가 대폭 상승한 것이 소비자물가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달러 대비 엔의 실질실효 환율지수(각국의 물가와 교역 비중을 고려한 통화의 실질 가치)는 1월 기준 67.55로 1972년 이후 50년 만에 가장 낮았다. 100을 넘으면 화폐 가치가 고평가 상태이고 100보다 낮으면 저평가됐다는 뜻이다. 즉 엔의 실질 가치가 50년 전 수준으로 급락한 셈이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조만간 금리를 올릴 뜻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 당분간 달러 대비 엔 가치가 상승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영국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북해산 브렌트유 역시 지난해 1월 배럴당 50달러대에서 현재 90달러대로 급등했다. 2014년 9월 이후 약 7년 반 만의 최고치다.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일각에서는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수입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일본 경제는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다. 현재 도쿄 도심의 휘발유 가격은 L당 약 170엔으로 2년 전에 비해 30% 정도 올랐다. 물류비용 또한 덩달아 뛰고 있다. 현재 목재, 알루미늄, 철강, 동(銅) 등 주요 원자재 가격 또한 큰 폭으로 상승했다.

커지는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는 2차 집권(2012년 12월∼2020년 9월) 내내 엔 약세로 수출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 경제 성장을 꾀하겠다는 소위 ‘아베노믹스’를 강하게 추진했다. 이를 통해 ‘기업의 매출 증대→근로자 임금 상승→소비 활성화’라는 선순환을 기대했다.

문제는 아베노믹스의 효과가 신통치 않았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근로자 임금도 크게 오르지 않았다. 1990년부터 30년간 일본의 평균 임금은 4.4% 올랐다. 물가 수준을 반영한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일본의 임금은 2015년 한국보다 낮아졌고 이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근로자는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기업의 매출 또한 감소하는 악순환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데 물가만 올라 일본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상승)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다. 경영 컨설턴트 도야마 가즈히코(富山和彦) 씨는 최근 NHK에 출연해 “근로자 임금이 오르지 않으면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 한번 빠지면 꽤 오래 이어지므로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최근에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까지 나서 기업들에 임금 인상을 압박하고 있다. 그는 “코로나19 이전 수준의 매출을 회복한 기업은 3% 넘는 임금 인상을 해 달라”며 구체적인 인상 수치까지 제시했다.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기시다 총리는 임금 인상을 통해 평범한 근로자의 표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하겠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기업의 임금 인상 여력이 크지 않다는 데 있다. 2013년 정부가 연금 지출을 줄이기 위해 65세까지 고용을 의무화하게끔 법을 개정한 후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대폭 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게다가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 국가이기에 연금 부담 또한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

물가가 더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또한 국민 불안을 부추긴다. 2020년 9월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전 총리는 집권 직후부터 통신 기업에 휴대전화 요금 인하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로 인해 당시 월 5000∼6000엔이었던 대용량 데이터 요금이 2021년 회계연도가 시작된 지난해 4월부터 2000엔 내외로 뚝 떨어졌다.

통신 요금 하락은 지난해 전체 소비자물가를 낮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올해 4월이 되면 이 요금 인하의 기저 효과는 사라진다. 소비자물가가 더 오를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