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지난번 칼럼 ‘극한 공포와 미지로의 기행이 피워낸 표해록’에 대해 여러 질문을 받았다. 장한철 일행이 안남국(베트남) 상선에 구조됐다가 탐라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쫓겨난 사연과 김대황 일행이 안남국까지 표류했다가 먼 길을 되돌아온 과정 등을 주로 물었다.
안남국 표착 자료를 꼼꼼히 살폈으나 장한철이 지은 ‘표해기행록’과 ‘김대황표해일록’ 외에 두 건의 기록을 더 찾는 데에 그쳤다. 일본, 중국, 대만 등으로 표류한 기록 수백 건에 비하면 희귀한 사례라 할 수 있다. 1687년 김대황 일행 24명은 탐라를 출항해 31일간 표류하다가 안남국에 닿았다. 그곳에서 환대를 받으며 생활하다가 중국 상선을 통해 귀환했다. 1770년 12월 장한철 일행 29명은 강풍으로 조난당한 뒤 유구국(오키나와) 무인도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안남국 상선에 구조됐다.
두 표해록에는 주변국 사람들의 탐라인에 대한 인식이 뚜렷이 나타난다. 안남국 상선에 구조된 장한철 일행은 항해 중 한라산이 보이자 탐라 사람임을 알리고 내려주기를 간청했다. 한데 안남 상인들은 이들의 출신지를 알고선 죽이려 했고, 동승한 명나라 상인의 도움으로 표류했던 배에 태워져 풀려났다. 여러 날을 떠다니다가 청산도에 도착했을 때는 8명만 살아남았다.
두 가지 일화를 통해 당시 탐라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퍼졌음을 알 수 있다. 탐라 바다는 동아시아 주요 뱃길이었기에 외국 상선이 표착하는 일이 잦았다. 간혹 표류인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이 주요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제주목사 이기빈과 판관 문희연은 탐라에 표착한 안남국 상선에 실린 희귀한 물건에 눈이 멀어 재물을 취하고 배를 불태워 증거를 없앤 만행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이 배에 유구국 태자가 타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치 않다. 탐라 해안은 날카로운 암석이 수면 아래에 숨어 있어 외국 선박의 파선과 사망 사고가 잦았다. 약탈과 난파 사고가 거듭되면서 사실과 오해가 혼재된 소문이 확산된 게 아닐까.
정동유의 ‘주영편’, 정운경의 ‘탐라문견록’, ‘숙종실록’에 안남국에 표류했던 고상영의 증언이 수록돼 있다. 고상영은 김대황과 함께 표류했던 일행이다. 동일한 표류 사건이 두 사람의 표류기로 따로 전해지는 셈이다. 두 사람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안남국 표착 전말과 생환 경과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이들은 4개월간 머물렀던 안남국의 농경, 가축, 옷차림, 기후, 과일, 인심 등을 생생히 묘사했다. 가는 곳마다 주민들이 쌀, 젓갈, 동전 등을 풍족히 내줬다고 한다. 안남 국왕의 호의와 안남인들 도움으로 중국 상인에게 인계돼 광주, 천주, 영파 등을 거쳐 16개월 만에 귀환했다. 교류가 없던 미지의 땅에서 극적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안남국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한국과 베트남 수교 30년이 되는 해다. 교류가 없던 335년 전에도 조선인과 안남인의 훈훈한 만남이 있었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