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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앰비언트 뮤직과 엠씨스퀘어의 기억

입력 | 2022-02-25 03:00:00

2008년 4월 동아일보에 색다른 어린이날 선물거리 중 하나로 소개된 집중력 향상 보조기기 엠씨스퀘어. 동아일보DB

임희윤 기자


Q. 왜 봄비는 추적추적 내리는 걸까요. 좀 시원스레 오지 않고(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아이디 버**)

A. 아시다시피 봄이 여름보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기 때문입니다. (중략) 봄은 증발량이 많지 않으며, 우선 여름의 장마의 근원이 되는 장마전선이 발달하지 않는 것도 이유입니다. (아이디 p*****)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지식인’ 서비스에 올라왔던 문답이다. 아이디 p***** 님은 지식인에서 ‘영웅’ 등급이다. 정중한 문체까지, 어쩐지 신뢰가 간다. 그러나 그 아래 달린 ‘평민’ 계급 s******* 님의 ‘직구(直球)’성 답변에 더 정이 간다. ‘그럼(봄비가 많이 오면) 소풍을 못 가자나!!’

#1. 금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 후보인 래퍼 신스의 쓸쓸한 노래 ‘봄비’(QR코드)를 듣다 마음에 물음표 모양의 푸른 싹이 돋아났다. 내 안에 묵은 오래된 질문이다. ‘그러게. 왜 노래 속 봄비는, 상상 속 봄비는 늘 추적추적 내릴까?’

‘터미널에 내려 혼자 걷지. 바로 향하는 작업실/사람들 사이로 내려 봄비. 대전에도 내릴까 혹시’(신스 ‘봄비’ 중)

#2. 본명 신수진. 데뷔 전 신스는 대전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취준생’이었다. 평소 하고 싶던 음악에 죽기 전에 제대로 한번 투신해보고파 부친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음악 하고 싶어요.’ 그 길로 집을 나왔고 결국 혈혈단신 서울로 향했다고.

‘도착했다고 전활 걸어. 알았단 말 후엔 정적 (중략) 사랑한단 말 대신 emoji(이모티콘) 보내는/내 신세 여전히/아버지 가슴에 박힌 못이지’

감정 없는 로봇처럼 디지털로 변형된 신스의 목소리. 촉촉한 멜로디 위로 묘한 대비를 이룬다. 저 차갑고 무뚝뚝한 음성은 되레 듣는 이의 감정을 흔든다. 마치 편지지 위 검은 활자들처럼.

#3. 나도 열아홉 살까지 대전 토박이로 살았다. 그래서인지 저 노래가 가슴속에 흥건히 젖어든다. 여름비는 시원하다. 겨울비는 차갑다. 그저 피하자는 생각이나 들뿐. 그러나 미지근한 봄비는 다르다. 기꺼이 심장을 꺼내어 들고 흠뻑 적시고픈 충동이 인다. 심장에 암호처럼 새긴 빛바랜 추억이 번져 나오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젖어드는 도화지 위로 무늬가 나타나듯.

#4. 한때 서울 사람에 대한 무지와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엠씨스퀘어라는 집중력 향상 학습 보조기기 같은 게 세상에 나오던 시절이다. 헤드폰처럼 쓰고 있으면 신비한 음파가 나오는데 두뇌에 알파파를 발생시켜 사람을 차분하게 만든다고 했다. 가격이 비쌌다. ‘서울 학생들은 저런 거 사서 끼고 수능 준비를 할까.’ 이런 순진한 생각에 긴장도 했더랬다.

#5. 요즘은 그 옛날 엠씨스퀘어를 사지 않아도 된다. 유튜브나 음원 플랫폼만 켜면 ‘잔잔한 수면 음악’ ‘광릉 숲속에 내리는 빗소리’ ‘스타벅스 ××점 10시간 배경음’ 같은 콘텐츠가 널려 있어서다. 이런 백색소음들을 전문용어로는 앰비언트 사운드, 앰비언트 뮤직이라고도 부른다. 영상과 음악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인위적으로 찾는 여백의 콘텐츠인 셈. 삶에 빈 칸이 필요할 때마저 우리네 현대인은 무위의 명상 대신 뭐라도 재생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그러고 보면 쏴아 하고 퍼붓지 않는 미적지근한 봄비의 미학은 그 여백에 있지 않나 싶다. 추억이나 회한이 그 위로 방울방울 맺히는 이유는 그 ‘추적추적’의 자연스러운 빈칸 덕분 아닐까.

#6. 지난해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을 수상한 싱어송라이터 정밀아 역시 신스의 ‘봄비’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서울역에서 출발’이란 노래로 말이다.

‘근데 엄마 혹시 그날이 생각나세요?/내가 혼자 대학 시험 보러 온 날/옛날 사람 봇짐 메고 한양 가듯이/나도 그런 모양이었잖아요’

서울 사람은 여행 가고 출장 가려 서울역에서 다른 지역을 향해 출발하지만, 상경한 사람의 삶은 서울역에서부터 서울의 안쪽을 향해 출발한다. 가도 가도 닿지 않는 서울발 서울행의 인생 열차는 이 나이 먹고도 종착역을 모른 채 달린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온 ‘꿈’(조용필)의 화자도 그럴까.

‘서울역에서 출발한 내 스무 살은/한 백 번은 변한 것 같아’(‘서울역에서 출발’)

정밀아의 노래 위로 신스의 랩을 겹쳐본다. 내 맘속 비의 스크린에 두 작품을 동시상영 한다.

‘봄비, 봄비 내렸지. 봄비/우산도 없이 맞는 봄이지’(‘봄비’)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