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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장택동]러시아의 체르노빌 점령

입력 | 2022-02-26 03:00:00


“나는 시대를 체르노빌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고 싶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했던 말이다. 그는 이 사고를 돌이켜보면서 “5년 뒤 소련이 붕괴하는 주된 원인이 됐다”고도 했다. 그만큼 당시 소련에 정치적·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고, 전 세계에 핵의 무서움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36년이 지난 지금, 이번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마자 체르노빌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1986년 4월 26일 오전. 당시 소련에 속했던 우크라이나 북부의 체르노빌 원전 4호기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관료제에 빠진 소련 당국은 사건을 축소하는 데 급급했고 대응은 느슨했다. 결국 히로시마 원자폭탄보다 400배나 많은 방사능이 누출되면서 유럽까지 퍼져 나갔다. 이 사고의 여파로 최대 15만 명이 희생됐다는 분석도 있다. 사고 이후 원전 주변 30km는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됐고,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한 방호벽도 세웠지만 여전히 시설 안에 방사성물질이 남아 있는 상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첫날인 24일 체르노빌을 점령한 이유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로이터통신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에 파병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는 러시아군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러시아군이 원전 관리 직원을 억류하자 미국 백악관에서 “인질을 석방하라”고 비난하는 등 러시아와 서방 간의 갈등도 커지고 있다. 소련의 잘못으로 벌어진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해 악몽을 겪었던 유럽국들을 향해 방사능 누출 가능성을 운운하며 협박한 것이라면 비열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반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방사능을 누출시키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는 관측도 나온다. 우크라이나가 체르노빌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쳤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원전이 중요하다기보다는 러시아군이 벨라루스를 통해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로 진격하기 위해 중간 지점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체르노빌을 접수했다고 본다. 어떤 이유에서든 러시아군 입장에서 체르노빌은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지역이었던 셈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공격 개시를 알리는 연설에서 소련 붕괴 이후 “세상 힘의 균형이 깨졌다”고 주장했다. 세계 양대 강국으로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냉전시대의 소련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국을 짓밟는 것만으론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체르노빌 사건을 ‘역사상 최악의 인재(人災)’로 키웠던 러시아 내부의 문제점부터 돌아보는 게 푸틴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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