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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포격소리…무작정 도망나와 어떻게 살지 막막”

입력 | 2022-02-26 03:00:00

[러, 우크라 침공]우크라-폴란드 국경지역 르포




메디카=김윤종 특파원

“어린아이 3명을 데리고 죽을힘을 다해 탈출했습니다. 이동 내내 포격 소리가 들려 정말 무서웠습니다.”

25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서부와 인접한 폴란드 남동부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서 만난 30대 우크라이나 주부 올가 씨는 생면부지의 기자를 만나자마자 “탈출한 것은 다행이지만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폴란드에서 어떻게 살지 막막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메디카와 인접한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프에 살던 그는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탈출했다. 이날 검문소는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대피한 사람과 남겨진 가족이 걱정돼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양쪽에서 모두 몰려들면서 입출국 수속 절차에만 5∼7시간이 걸렸다. 검문소 앞에 늘어선 차량 행렬 또한 최소 3km에 달했다.

폴란드 국경경비대 대원은 입국 심사 현장을 보기 위해 검문소 내부로 들어가려는 기자를 강하게 제지했다. 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통제가 어렵다.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7시간째 국경 서성인 엄마 “곧 따라온다던 아들, 소식이 없어”


“대피못한 사람들 지하실 등 숨어… 러시아군이 집마다 수색 소문도”
“벌써부터 곳곳서 식량부족 호소”… 국경도시 숙박시설 모두 만실
폴란드정부 “수용장소 세울 것”… EU “우크라인 지원대책 마련”
대피 韓교민 “설마했는데 전쟁”



검문소 빠져나오는 피란민들 25일 우크라이나-폴란드 국경지대에 설치된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서 폴란드로 입국한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이 입국 수속을 마치고 검문소를 빠져나오고 있다. 메디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자신은 국경을 넘었지만 미처 가족이 우크라이나를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도 프셰미실 메디카 검문소 부근에서 애타는 심정을 드러냈다. 국경 지대에 거주해 비교적 쉽게 폴란드에 왔다는 여성 나디아 씨(56)는 “키예프에 사는 아들이 곧 따라오겠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휴대전화도 꺼져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며 7시간째 검문소를 서성이고 있다고 했다.

침공 당시 러시아군 진격의 주요 통로가 됐던 북동부 하리코프에서 대피한 베르키나 씨(20)는 공습 순간을 ‘악몽’이라고 전했다. 그는 “24일 새벽 5시부터 집 주변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뒤집어진 것 같아 정말 무서웠다”고 했다. ‘러시아군이 수색에 나섰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다고 했다. 그는 “타국으로 대피하지 못한 채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지하실 등에 숨거나 산간오지로 갔다”고 했다.
○ “우크라는 이미 식량 부족”

프셰미실 중앙역은 우크라이나 피란민촌으로 탈바꿈했다. 침대가 설치되고 배급이 이뤄지면서 우크라이나 피란민 소녀가 간이침대에 앉아 배식을 받고 있다.

검문소에 도착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대피한 사람들은 대부분 여유가 있는 편”이라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식량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지 소셜미디어에는 ‘침공이 시작된 24일 곧바로 생수와 식료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갔지만 진열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 세계 밀 수출량의 30%를 생산하므로 이번 사태로 세계 식량난이 심화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프셰미실 중앙역에도 기차를 타고 피신한 우크라이나인이 몰렸다. 역 관계자들이 피란민에게 음식을 나눠 줬지만 금세 동났다. 도심의 주요 현금인출기 또한 일제히 작동을 멈췄다. 은행 측은 “우크라이나 피란민이 너도 나도 돈을 뽑으려 해서 순식간에 남아 있던 현금이 바닥났다”고 설명했다. 인근 야로스와프의 숙박시설 또한 전부 만실이다. 이곳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토마스 씨는 “24일 밤부터 숙박을 문의하는 우크라이나인의 전화가 빗발쳤다”며 현재 상당수 투숙객이 우크라이나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우크라군, 키예프서 방어태세 25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군인과 군용차들이 수도 키예프로 통하는 다리를 막고 러시아군의 진입에 대비한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다. 키예프=AP 뉴시스 

폴란드 정부는 25일 성명을 통해 “국경에 피란민 수용 장소를 만들고 우크라이나인에게 부상 시 입원 등 의료 서비스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또한 “우크라이나인을 지원하는 비상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는 러시아의 침공 전부터 이미 “5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영국 가디언은 침공 첫날인 24일에만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사람이 10만 명 이상이라는 유엔난민기구의 추산치를 전했다.
○ 한국 교민도 목숨 걸고 국경 넘어
한국 교민 7명도 목숨을 걸고 폴란드에 왔다. 코르초바 국경검문소에서 만난 김도순 씨는 키예프에서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는 “설마 했는데 진짜 전쟁이 났다. 자동차에 가족 5명이 탑승해 600km 이상을 달렸다”며 “검문소에 도착하기 전부터 차량 대기 줄로 인근 도로가 꽉 막혔다”고 전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는 67명의 교민이 남아 있다. 이 중 11명은 현재 루마니아 국경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앞서 한국 정부는 16일 리비프와 프셰미실에 임시 사무소를 설치했고 교민의 육로 대피를 돕고 있다.

이 난리통에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키예프에서 살다 3년 전 돈을 벌기 위해 프셰미실에 왔다는 이반 씨(37)는 “집에 만삭 아내와 3세 아들이 있다. 러시아군이 무섭지만 가족을 위해 무조건 집에 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러시아의 침공 후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메디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