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애정이 당신을 살아남게 만든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소개할 전시는 제가 직접 보러 가기 전 이미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여러 번 미리 접했던 전시인데요.
그만큼 아는 사람들은 이미 전시 소식을 발 빠르게 접하고 있는, 해외 미술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미 한 번쯤 다녀오셨을 법한 전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 웨이웨이는 최근 한국 전시는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도 영어로 자서전을 발간하며 활발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예술 작품뿐 아니라 사회 운동이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등 다방면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한국 전시만 보면 이 사람이 왜 그렇게 주목받는지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이 웨이웨이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사랑 받는 작가가 되다아이 웨이웨이 개인전
1.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은 20세기 개념미술, 팝아트와 차별점을 찾기가 어렵다.
3. 그 다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감동을 주었다.
○ 저기…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아이 웨이웨이, 원근법 연구, 1995-2011(Study of Perspective), 2014년 사진제공: 아이 웨이웨이 스튜디오와 베를린 노이거리엠슈나이더
아이 웨이웨이, 원근법 연구, 1995-2011(Study of Perspective), 2014년 사진제공: 아이 웨이웨이 스튜디오와 베를린 노이거리엠슈나이더.
아마 아이 웨이웨이에 대한 정보 없이 전시장에서 이 작품을 본다면, ‘이 분은 왜 이렇게 화가 나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위 작품을 보면 이해가 될텐데요. 첫 인상은 당황스럽지만 전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라한 작품, 바로 ‘원근법 연구’입니다.
첫 시작은 바로 1995년, 톈안먼 광장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계신다면 아이 웨이웨이의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집회를 벌인 시민과 학생들이 사망한 텐안먼 사태인데요. 아이 웨이웨이는 작업 초기부터 일관되게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과 개인의 억압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즉 이 작품은 1차적으로는 개인을 억압하는 공산주의 체제를 상징하는 톈안먼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이 웨이웨이, 원근법 연구, 1995-2011(Study of Perspective), 2014년 사진제공: 아이 웨이웨이 스튜디오와 베를린 노이거리엠슈나이더.
그런데 이 작품은 톈안먼 광장뿐 아니라 파리 에펠탑, 워싱턴 국회의사당, 로마 콜로세움 등으로 확장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작품은 좀 더 넓은 의미를 띠게 됩니다.
우선 제목이 ‘원근법 연구’인 것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작가는 흔히 유명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건물이나 장소 앞에 가서 자신의 손가락을 더 가까운 곳에 위치시킨 채 사진을 찍고 있죠.
원근법을 단순하게 말한다면, ‘가까이 보이는 것이 더 크게 보인다’고 할 수 있을텐데요. 또 통상 시각 예술에서 중요한 것일수록 더 크게 그려진 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볼까요.
작가는 역사나 국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정해준 중요성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개인의 판단과 의견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즉 아이 웨이웨이는 사람과 문화마다 갖는 다른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권위주의와 독재에 화가 나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작품만 봐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미술사적으로 이러한 작품들이 새로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르셀 뒤샹, L.H.O.O.Q, 1919년
아이 웨이웨이의 유머러스한 저항과 권위주의에 대한 분노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에서 태동한 다다이즘 예술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작가가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모나리자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기 훨씬 전, 마르셀 뒤샹은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으면서 서양 예술의 전통과 권위에 의문을 제기 했지요.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하고 ‘샘’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미술 기관이나 국가가 정해주는 가치가 아니라, 작가 개인이 정하는 가치가 의미 있다고 선언해 미술사 불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 경향에서 다다이즘이나 팝아트와 차이점을 찾는다면, 그가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차이점일 것 같은데요.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아이 웨이웨이는 (특별하게 새롭지 않은) 작품을 넘어 어느 부분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답은 작가의 인간적인 매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강자에 저항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용기
아이 웨이웨이, 조명(Illumination), 2009년. 사진제공: 아이 웨이웨이 스튜디오
이 사진은 2009년 8월 아이 웨이웨이가 청두의 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새벽 5시에 경찰에게 둘러싸였을 때 핸드폰으로 찍은 자신의 모습입니다. 당시 그는 사회 운동가의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청두를 찾았다가 경찰에 연행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사건의 발단은 1년 전 중국 쓰촨성에서 있었던 대지진입니다. 2008년 5월 12일 쓰촨성에 강도 8.0 지진이 발생합니다. 아이 웨이웨이는 이 때 피해를 입은 지역을 찾아 다니며 영상으로 기록을 남겼습니다.
또 이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이 사망했는데요. 학교 붕괴의 원인이 지진뿐 아니라 부실시공도 작용했음에도 정부가 이를 투명하게 밝히지 않자, 아이 웨이웨이는 봉사자들을 모아 사망한 학생들의 이름과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자신의 블로그에 지속적으로 공개했지요.
그리고 2009년 4월, 피해자 5385명의 이름을 수집해 블로그에 공개했으며 한 달 뒤 중국 정부는 이 블로그를 폐쇄합니다. 또 건축가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사무소 벽에 학생들의 이름을 게시했습니다.
이후 이 학교의 부실시공에 대해 알린 사회운동가 탄줘런의 재판에서 증언하려던 아이 웨이웨이는 경찰에게 폭행을 당합니다. 2010년에는 상하이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마저 철거되고 말죠. 불과 2008년만 해도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 건설의 예술 자문을 맡았던 그는 순식간에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맙니다.
새의 둥지를 연상케 하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은 아이 웨이웨이가 예술 자문을 맡았다.
아이 웨이웨이는 이후에도 수차례 가택 연금을 당하거나, 탈세를 이유로 80일 넘게 체포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정부의 억압을 받는 그의 소식이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근 발간한 회고록 ‘1000 Years of Joys and Sorrow’을 통해 개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려는 이유를 자신의 삶을 통해 밝혔는데요.
아이는 중국의 유명한 시인 아이 칭(Ai Qing, 1910~1996)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족은 마오쩌둥에 의해 추방당해 신장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살았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매일 화장실 청소를 했었다고 그는 기억합니다. 결국은 이데올로기 다툼으로 존재를 부정당했던 아버지가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다만 그의 가족은 문화 혁명이 끝난 뒤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왔고, 아이 웨이웨이는 중국의 개혁 물결을 타고 미국으로 유학 간 몇 안 되는 엘리트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 앨런 긴즈버그를 만나 자신의 아버지를 이야기 하며 그와 가까워 졌고, 당시 뉴욕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직접 느끼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경험 끝에 부당함에 맞서고 약자의 편에 서려는 태도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 예술의 힘을 활용하는 사회 운동가
아이 웨이웨이, 해바라기 씨, 2008년 / 2010년 전시
아이 웨이웨이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린 또 한번의 사건은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그가 보여준 대규모 설치 작품입니다. 이 작품 덕분에 ‘해바라기씨 작가’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곳은 영국의 현대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에 들어서면 볼 수 있는 거대한 전시 공간 ‘터빈 홀’입니다.
이 곳 바닥에 무언가가 깔려 있고 사람들이 그 위를 지나다니거나 눕거나, 앉으면서 마치 모래사장처럼 마음껏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이시죠?
사람들의 발아래 놓여 있는 것은 바로 약 1억 개의 해바라기 씨 모형입니다.
아이 웨이웨이, 해바라기 씨, 2008년 / 2010년 전시
아이 웨이웨이는 테이트 모던 전시를 위해 중국의 도자기로 유명한 징더전 시의 수많은 사람들과 협업해 해바라기 씨를 만들어 냅니다. 즉 미술관에 깔린 해바라기 씨는 모두 흙을 빚어 구워서 만든 조그마한 도자기(porcelain) 입니다.
작가가 해바라기 씨를 선택한 것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중국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해바라기’에 비유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태양으로, 그리고 국민들은 그 태양을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곤 했다고 합니다.
또 실제로 중국의 사람들은 부자건, 가난하건 해바라기 씨를 선물로 주고받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할 때에도 해바라기 씨를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쌀’이 한국인의 상징처럼 여겨졌듯이 해바라기씨에도 그런 의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이 웨이웨이는 그래서 거대한 전시장을 태양 대신 해바라기 씨로 가득 채워 버립니다. 씨 한 알 한 알은 아주 작지만, 그것들이 거대한 규모로 모이자 압도적인 비주얼이 탄생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독재와 개인을 향한 억압을 이겨낼 수 있다는 은연중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중국 특유의 상황에서 가능한 거대한 스케일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이 또 다른 아이 웨이웨이 작품의 특징입니다. 한국 전시에는 이런 규모의 작품이 없어, 다소 아쉬울 수는 있겠습니다.
저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에 놓인 작품을 보면서, 아이 웨이웨이는 예술을 아주 단순한 형태와 거대한 규모로 만들면서 이것을 자신의 사회 운동에 적절하게 활용하는 사회 운동가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긴 했습니다.
사실 예술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은 ‘20세기 다빈치’로 불리는 독일 작가 요셉 보이스가 이미 더 심화된 형태로 보여준 바가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향한 애정과 용기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이 웨이웨이의 뜨거운 열정을 전시장에서 한 번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한 줄로 보는 전시
아이 웨이웨이의 유머와 저항정신을 직접 만나다.
추천지수(별 다섯 만점) ★★★
전시 정보
아이 웨이웨이 - 인간미래
2021. 12. 11 ~ 2022. 4. 1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울 종로구 삼청로 30)
작품수 120여점
‘영감 한 스푼’ 연재 안내
※‘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구독 신청 링크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51199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