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탈원전 행보가 불만인 듯… 이스라엘 바락-8ER로 선회 우려
[사진 제공 · 방위사업청]
무슬림은 유독 신용을 중시하는데, 쿠란이 규정한 ‘하즈(Hajj)’ 의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즈는 이슬람력으로 매년 12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력 기준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성지 메카를 순례해 예배해야 한다는 의무다. 무슬림이라면 일생에 한 번은 하즈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메카는 여러 나라에서 온 무슬림들의 거대한 교류 장(場)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사람과 정보가 교차하는 공간에서 누군가 신용을 배반했다는 소문이 돌면 그 사람은 이슬람 사회에서 순식간에 매장됐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키사스 원칙
이러한 문화적 배경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는 다른 문화권에는 없는 상거래와 금융 형태가 존재한다. 별다른 법적 안전장치 없이도 채권-채무 관계를 적은 쪽지 한 장이 어음 구실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송금 절차 없이 돈을 맡긴 사람의 이름과 미리 정한 암호만으로 거래가 이뤄지는 ‘하왈라(Hawala)’라는 독특한 금융시스템도 존재한다. 이런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무슬림이 신뢰를 대단히 중시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신뢰를 어길 경우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슬람 사회에서 약속을 어긴 자를 응징하는 윤리적 잣대가 이른바 ‘키사스’ 원칙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비례 대응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가 나를 비방했다면 동일하게 비방해 맞서고, 상대가 나를 속였다면 나 역시 상대방을 속여 보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장황하게 이슬람 문화를 소개한 것은 한국 방위산업이 중동에서 키사스 원칙에 따라 보복당할 움직임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최근 이슬람 국가 아랍에미리트(UAE)는 한국의 일견 이중적 행보에 불만을 품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국에 천문학적 규모의 원자력발전소 설비를 판매해놓고 탈(脫)원전 정책을 펴는 것을 ‘신뢰 위반’으로 보는 듯하다. 만약 UAE가 키사스에 나서면 당장 한국이 추진하는 천궁-Ⅱ 대공미사일 수출길이 막힐 우려가 있다.
1월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동 순방 일정 중 UAE에서 사상 최대 규모인 4조 원대 방산 수출 실적을 세웠다고 홍보했다. 지난해 11월 예멘 후티반군의 미사일 공격이 거세지자 UAE 측 요청으로 천궁-Ⅱ 대공미사일 수출 협상이 시작됐다. 당초 UAE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제가 문 대통령과 회담에서 수출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회담을 앞두고 UAE 측이 일정 변경을 통보했고 무함마드 왕세제는 결국 회담에 나타나지 않았다. 청와대는 무함마드 왕세제 측이 별도로 연락을 취해 ‘형제애’ ‘신뢰’ 등 가치를 강조하며 회담 무산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밝혔다. 다만 회담이 일방적으로 취소된 이유에 대해선 상세히 밝히지 않았다.
한국과 계약 직후 이스라엘 접촉 보도
UAE의 이스라엘 방공시스템 도입이 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에서 천궁-Ⅱ 수출에는 차질이 없을까. 이스라엘 정부 관계자가 언급한 바락-8ER 대공미사일은 UAE의 방공시스템 도입 검토 과정에서 천궁-Ⅱ와 경쟁한 모델이다. 이스라엘이 개발한 해당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최대 150㎞로 순항미사일은 물론, 전술 탄도미사일도 요격할 수 있다. UAE는 이란의 탄도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고자 이스라엘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미사일인 애로우(Arrow) 시리즈에도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UAE가 이스라엘 방공 무기를 구매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전에서 검증된 이스라엘의 다단계 MD 시스템을 자국에 고스란히 이식하려는 것이다. 주변 국가를 적으로 둔 이스라엘은 아이언돔→패트리엇→데이비드 슬링→애로우 미사일로 이어지는 다단계 MD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경북(1만9030㎢)보다 조금 큰 면적의 국토(2만2145㎢)에 구축된 이스라엘 방공시스템은 그동안 적대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왔다.
당초 UAE 측은 천궁-Ⅱ 인도 시기가 늦춰지는 것에 불안감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밝힌 천궁-Ⅱ 인도 시기는 2024년이다. UAE는 당장 이란과 예멘 후티반군의 미사일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천궁-Ⅱ만 마냥 기다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천궁-Ⅱ보다 신속하게 도입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방공 무기가 매력적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최근 이스라엘이 주도하는 ‘중동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반(反)이란 군사협력체제 창설 기류도 한몫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미사일 위협에 맞서 UAE,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등 인근 이슬람 국가들과 군사협력체제 구성에 나섰다. 이와 동시에 자국의 MD 시스템도 적극 홍보하고 있다.
이스라엘 미사일 시스템, 미국과 호환성↑
이스라엘의 바락-8ER 대공미사일.[위키피디아]
천궁-Ⅱ 계약식 때 UAE 실세인 무함마드 왕세제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도 해당 계약을 자신이 보증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을 개연성이 적잖다. 이슬람 문화는 표리부동(表裏不同)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국에서는 탈원전 기치를 높이 들고 외국을 상대로 원전 세일즈에 나선 한국의 진정성을 의심한 것일 수 있다. 이스라엘 MD 시스템의 매력이 높아진 상황에서 한국 신뢰도가 낮아진다면 천궁-Ⅱ 수출 앞길은 어둡다. 결국 천궁-Ⅱ의 UAE 수출은 대선 후 새 정부가 어떤 원전 정책을 펼치고 어떻게 UAE와 신뢰를 회복하는지에 달렸다. UAE가 키사스 원칙에 따라 방산 협력 판을 엎는 것을 방관해선 안 된다. 천궁-Ⅱ가 UAE에 무사히 납품될 수 있도록 차기 정부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28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