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삶을 유희하다
어느 날 자식이 입대한다. 입영하는 길이므로 자식은 특별히 화려한 옷을 입거나 특별히 누추한 옷을 입지 않는다. 대체로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떠난다. 그리고 며칠 뒤, 군복을 입기에 이제는 필요 없게 된 그 평상복이 우편으로 어머니에게 되돌아온다. 적지 않은 어머니들이 돌아온 그 옷을 보고 흐느낀다.
세월이 지나면 그 어머니도 죽는다. 이 세상에 남은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난 이가 남긴 물건을 정리해야 한다. 누군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이제는 있지 않은 장소에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게 된 물건들을 분류해야 한다. 적지 않은 유족들이 그 물건들을 손에 쥐고 흐느낀다. 어떤 것은 간직하고,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남에게 줘야 한다. 그러나 간직할 수도, 버릴 수도, 줄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다. 망자가 평소에 입던 옷이 그러한데, 남은 사람들은 대개 망자의 옷을 태운다.
이처럼 ‘입던’ 옷은 그 사람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환기한다. 입던 옷은 아직 입지 않은 옷과는 다르다. 누군가 옷을 입음으로써 그 옷은 변형된다. 팔꿈치와 무릎 부분이 튀어나오고, 체형에 맞게 주름이 잡히고, 눈물과 국물이 떨어지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낡아간다.
다음 달 27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볼탕스키의 유작전에 전시된 ‘저장소: 카나다’(1988년). 벽면 가득 걸린 헌 옷들은 옷 주인들의 존재이자 부재를 상징한다. 김영민 교수 제공
볼탕스키는 입던 옷들을 걸어 뒀을 뿐 아니라 한가득 쌓아 두기도 했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을 방문한 뒤 대지의 예술제 ‘에치고쓰마리 트리엔날레’에서 볼탕스키는 ‘무인의 땅(No Man’s Land)’이라는 이름으로, 입던 옷을 산더미같이 쌓아 올렸다. 일찍이 2010년 파리 그랑 팔레 전시장에서 볼탕스키는 ‘페르손(Personnes·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옷들로 이뤄진 거대한 봉분을 만든 적이 있다. 허공에서 거대한 크레인이 봉분 위로 내려와 옷들을 무작위로 집어 올렸다가 놓는다. 그것이 전부다.
2010년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 전시장에 선보인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페르손’(사람들). 사람들이 입던 옷을 쌓아 커다란 봉분을 만든 뒤 거대한 크레인이 옷들을 집어 끌어올렸다가 놓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인간의 구원’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진 출처 METALOCUS 홈페이지
그 짓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인형 뽑기 기계가 주는 묘한 기대감과 허탈감을 기억한다. 어지간히 숙달된 사람이 아니라면, 집게발로 인형 들어 올리기에 실패하게끔 돼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나 인형을 들어 올릴 수 있다면 그 기계는 수지가 맞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인형을 들어 올리려고 안달하되 정작 들어 올리는 데는 실패해야만 인형 뽑기 기계의 존재 이유가 생긴다.
어떤 특정한 옷을 들어 올리겠다는 의도 자체가 없고, 크레인은 그저 닿는 대로, 집히는 대로 들어 올린다. 마치 삶의 성패가 어떤 계획이나 의도 없이 그저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는 듯.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 그리스도, 마리아 등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받는 모습이 담겼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볼탕스키의 작품 속에서 헌 옷들은 마치 구원이라도 받는 양 들어 올려진다. 중력을 이기고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헌 옷들은 예외 없이 무력하게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볼탕스키는 이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섭리에 의한 구원받는 삶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삶. 들어 올려지듯 하다가 결국 떨어져 끝나는 삶. 그런 삶이라도 인간은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살다가 간 볼탕스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미술가는 삶을 유희하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