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어령 선생 영전에’ 김병종 화백의 추모 기고
2019년 서울 종로구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왼쪽) 자택에서 이 전 장관과 함께한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 김병종 교수 제공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1년은 어떤 면에서 그의 전 생애를 견인할 만큼의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그가 보낸 지상의 시간 대부분이 문명과 생명, 그리고 시대에 대한 번뜩이는 레토릭으로 일관된 것이었던 데 반해, 마지막 1년은 비언어적 서사를 보인 ‘몸’의 시간이었다.
시시각각 소멸해가는 육신의 시간 너머로 황홀하게 펼쳐지는 또 다른 생명세계를 응시하면서, 이 언술(言術)의 귀재는 평생의 무기였던 언어를 놓아버린 대신, 죽음이 곧 생명이며 새로운 탄생이라는 비언어적 알고리즘 하나를 완성하였다. 일찍이 딸 이민아 목사의 죽음을 통해 참척(慘慽)의 슬픔 너머에서 새로운 생명세계로 이동해 가는 모습을 경외감으로 바라보았던 선생은 이를 자신의 것으로 육화시키고 체현하였다. 그가 한사코 일체의 항암치료나 투약을 피하려 했던 것도 맑은 정신 속에서 끝까지 진화해가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싶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내게 들려준 얘기 한 토막. 세상에서는 내가 딸의 회생을 놓고 신(神)과 ‘딜’을 벌인 것으로들 알고 있지만, 삶과 죽음의 문제가 피할 수 없는 주제로 내게 다가온 것은 전혀 다른 각도와 방향에서였어요. 오래전 연구년으로 일본의 한 소도시에 머물던 시절, 편의점 불빛만이 새어나오는 깜깜한 벌판의 교차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어요. 하늘엔 별이 총총했는데 우주에 홀로 내팽개쳐진 느낌이었고 간절하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었죠. 그때 얼핏 내 앞으로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만진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날 밤의 그 형언할 수 없고 압도적인 느낌을 묻어두고 있었는데, 훗날 환히 웃으며 죽음을 맞아들이는 딸을 보고, 문득 그것은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면에서 내 딸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내 앞에서 등을 밝힌 맑은 선지식 같은 존재였던 셈입니다. 나는 영적(靈的) 지진아였고.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