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창업가 인터뷰 시리즈 ‘Question & Change’를 신문 지면에 연재하고 있다. 하지만 창업가가 걸어온 길을 한정된 지면에 싣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지면에 미처 싣지 못한 대화 내용을 추가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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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224/112031438/1
▽성우석 ㈜콥틱 공동대표(43)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했더라.
통계학과는 사실 점수를 맞춰서 갔다(웃음). 공부하다보니 통계학과는 잘 안 맞는다는 생각에 경영학을 복수 전공했다. 회계사 준비도 그 당시에 했다.
―회계사 일은 얼마동안 한 건가?
―아버님이 사업을 하셨는데, 그걸 이어받을 생각은 안 했나.
삼성증권에서 컨설팅을 계속 해야 하나, 아니면 사모펀드로 옮겨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이쪽(제조업) 업무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 해서 하게 됐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아버지 사업을 도와드렸다.
아버지는 30년 넘게 엔지니어 생활을 했고, 엔지니어링을 바탕으로 20~30년 사업을 하셨다. 원래는 내게 사업을 이어받으라 하셨다. 하지만 내가 가보니 그곳에선 아버지의 말씀이 곧 법이었다. 내가 “이렇게 해야 단가를 낮출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그곳에서는 신입사원 급이 사업을 하겠다고 설치는 것과 같았다.
갑갑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공부를 하다가 롱테일 경제학의 창시자인 크리스 앤더슨의 ‘메이커스’라는 책을 접했다. 그 책을 통해 3D 프린팅을 알게 됐다. 책에 나온 것들을 하나하나 다 실행해봤다.
―책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하나씩 해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제조는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분야였다. ‘Back to basic(기본으로 돌아가라)’이라고, 다시 제조업이 각광받고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역이 발달하지만 결국은 리쇼어링(reshoring·기업이 해외로 진출했다가 고비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 얘기도 많이 나오지 않나. ‘제조업은 근처에서 생산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3D프린팅이 핵심 기술이었다. ‘메이커스’ 책을 읽다보니 ‘이런 게 있네, 재밌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조업에 적성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공장을 많이 다녔던 기억이 있다. 또 M&A 업무를 할 때도 제조업 분야를 자주 맡았다. M&A를 하려면 회사를 잘 파악해야 했는데, 당시 나는 현장을 많이 다녔다.
특히 자동차 부품업 현장을 많이 갔다. M&A 뱅커들은 전화 통화로 필요한 부분을 해결할 때가 많다. 하지만 나는 현장에 가서 일하는 체질이라, 일하기 시작하면 공장 등 현장을 다니며 그 곳 분들과 생활을 함께 했다.
―본업을 그만둘 때 걱정은 안 됐나.
회계법인은 군 복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뒀고, 그 다음에는 뱅커 생활을 했지만 워낙 이직이 많은 직업군이라 퇴사 자체에 대한 부담은 별로 없었다.
일을 ‘무대뽀’ 방식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던 경험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삼일회계법인에서 근무할 때는 군복무 전이었는데, 당시 미필·미혼 남자는 출장을 많이 보내거나 연속성 없는 일을 많이 시켰다. 답이 없는 컨설팅 업무도 많이 했다. 선배들과 다같이 밤을 새워가면서 답을 찾았다. 이 모든 게 창업을 위한 준비와 교육이었던 셈이다.
심신이 지쳐서 관둔 것도 있었지만, 내 상사들의 모습이 감당이 안 됐다. (그 연차가 되어도) 여전히 지금 나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컨설턴트라는 직업 자체가 수명이 짧다. ‘50세, 60세가 됐을 때 나는 무엇을 할까’ 라는 생각 했을 때 답이 안나왔다. 지금은 평생 직업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일을 그만둔다고 하니 가족의 반응은.
아내는 나를 믿어줬다. 회계사 자격증도 있으니 최악의 경우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다. 내가 처음에 3D프린팅을 한다고 했을 때는 다들 ‘두세 달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점점 살을 붙이고 구체화시키니 ‘네가 사업을 아느냐’며 아버지가 특히 많이 말렸다. 지금은 아버지가 제일 지원을 많이 해 준다.
―사업가인 아버지로부터는 뭘 배운 거 같나
외주를 어떻게 쓰는지, 전문가는 어떻게 찾아내는지 등을 배웠다.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뭐가 부족한지 알아야 전문가를 찾을 수 있다. 내가 다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어떻게 얼마나 버텨야 하는지도 배운 것 같다.
당시 나는 집에 장비를 들여오고, 컴퓨터를 한 대 사서 모델링부터 했다. 하다보니까 정말 재밌었다. 3D 모델링 프로그램 종류도 굉장히 많은데, 그 중에 한 프로그램으로 모델링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모델링을 해서 유럽 회사에 주문했다. 첫 제품은 아이폰 케이스였다. 모델링이 제일 쉽고 제품화하기도 편한데다 다양한 니즈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몰드를 만들 필요가 없으니 몰드 비용을 아껴서 만들면 재밌는 걸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공장을 별도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당시는 모델링해서 업체에 주문하면 흰색의 거친 표면을 가진 형태로 나왔다. 이걸 연마해야 해서 내가 손으로 일일이 다 사포질을 했다. 3D 프린팅 후 후가공이 중요했다.
또 안경은 3D 프린터로 최대 200개까지 한 번에 만들 수 있는데, 직접 사람 손으로 일일이 연마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연마 후에는 염색을 해서 색을 입혀야 한다.
제품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설비가 필요했는데, 찾아보니 관련 동영상들이 있었다. 그 영상을 몇 천 번 반복해 보면서 필요한 기계를 하나씩 주문해나갔다. 아버지 지인들 중에 중소제조업을 하는 분들이 많아 도움을 받았다. 지금 인덕원 공장에 있는 라인이 그렇게 영상 하나하나를 찾아서 만든 라인이다.
―사업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
모아둔 돈으로 시작했고, 기술보증기금으로부터 3억 원을 받아 프린터를 들였다. 그 이후부터는 속도가 빨랐다.
―기술보증기금은 뭘 믿고 자금을 대준 건가.
일단 내가 어떤 식으로 사업을 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 케이스를 시작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완제품을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주는 생산 플랫폼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팩토리형 디맨드’라고 해서, 요구가 있으면 팩토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그때 안경은 무조건 해야 하는 아이템이라 생각했다.
―안경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나 관심이 있나.
어릴 때부터 안경을 써왔는데 내 귀는 짝귀라 위치가 다르다. 그래서 예전부터 이걸 맞춰줄 수 있는 서울 논현동의 한 작은 안경점에서만 안경을 맞췄다. 늘 ‘왜 이 안경점은 잘 맞춰주는데 왜 다른 안경사한테 안경을 맞추면 안경이 비뚤어지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런 부분을 안경 제조에 반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맞춤형 안경을 제작하면서 쌓이는 빅데이터는 어떻게 활용되나
설계 노하우는 당연히 쌓이고 있다. 또 소비자들이 본인과 비슷한 얼굴의 유형을 선택하면 어울리는 안경을 추천해줄 수 있도록 데이터화시킨 알고리즘을 만들게 된다.
안경은 동그란 형태부터 네모에 가까운 형태까지 전통적으로 분류가 있다. 그 안에서 디테일 차이가 발생하는데, 변주가 발생하면서 디자인이 40여 가지로 확 늘어난다. 안경 디자이너들은 “여기에 0.2mm만 올리자” “0.3도를 꺾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것만으로도 느낌이 조금씩 달라진다.
―2017년 설립 후 지난해까지 회사가 쭉 성장했는데. 올해는 어떤 단계인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스케일업 단계에 있다. 스케일업 할 때 문제가 터지면 안 된다. 그래서 지난해 하반기에 브랜딩에 대해 많이 다잡고, 생산 과정도 훨씬 탄탄하게 다지는 작업을 했다.
직원은 계속 뽑고 있다. 지금은 개발자를 중심으로 채용하고 있다. 그동안 제품 디자인 쪽을 꽤 갖췄기 때문에 개발 인력과 그에 따른 디자인 백업도 많이 필요하다. UI, UX 디자이너 위주로 충원을 많이 하고 있고, 마케터들도 뽑는다.
올해는 브리즘의 오프라인 매장을 10호점까지 낼 계획이다. 다음달(3월)에 서울 잠실점을 오픈할 예정이다.
―콥틱의 조직문화는 어떤가.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다 보니 격이 없는 분위기다. 지난해부터는 팀장체제로 전환해 팀장과 많은 이야기를 하려하고 있다. 팀장들이 개선하는 시스템도 많이 생겼다. 예전에는 내가 직접 했다면, 지금은 팀장 등 직원이 하는 일의 속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팀장은 경력직이 입사하자마자 맡기도 하고, 신입사원이 팀장을 맡기도 한다.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재무와 관련해 조언한다면.
나는 현금흐름을 중요시 한다. 보통 매출에서 비용을 빼면 남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매출채권과 매입채무의 시기도 매우 중요한다. 그런 걸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날짜관리를 정확히 해야 한다. 콥틱은 B2C라 돈이 바로 들어오지만, B2B인 업체는 ‘(돈을) 3개월 뒤에 줄게’라고 했을 때 뭐라 말을 못한다. 즉각적으로 돈이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관리가 잘 안 되면 자금은 순식간에 구멍 난다. 자금 계획은 6개월 이상 세워놓아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쓰는지’ 확인하고 정확히 예측해야 한다. 투자 라운드가 도는데 최소 6개월이 걸린다. 처음엔 더 오래 걸릴 것이다. 거의 막판까지 끌고 가다가 시기가 안 맞아서 (사업을) 더 진행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것으로 안다.
―창업을 꿈꾸는 문과 출신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은.
나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스타일이라, 필요하다 싶으면 직접 만들어본다. 잘 만들지 못해도 계속 만들다보면 필요한 부분이 생길 것이다. 그때 그 부분에서 필요한 사람을 찾아도 되고, 외주를 주는 것도 방법이다.
―올해 CES에 참가한 성과는.
‘우리가 미국으로 가면 잘 될거야’라는 안이한 생각이 아니라 ‘미국으로 가면 잘 되겠지만 고생은 많이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고생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도 가늠하게 됐다.
미국에는 올해 3월 크라우드펀딩으로 온라인에 먼저 진출할 예정이다. 이후 실리콘밸리에서 오프라인 매장을 하나 내는 것이 목표다. 매장 내는데 최소 1년은 걸릴 것으로 보고 있어서 빠르면 내년 초가 될 것 같다.
―창업해서 가장 위기는 언제였나.
매일이 위기다.(웃음) 나 같은 경우 5개년의 사업계획을 잡고, 자금을 늘 모니터링하고, 매일 밤 통장잔고를 확인한다.
나는 소소한 실패를 많이 했다.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결국 혼자하려다가 타이밍을 놓친 경우가 많았다. 개발이 그런 경우다. 초창기에는 내가 많이 시스템을 맡았는데 엉성했다. 지금은 개발팀이 세팅되면서 전혀 다른 차원이 펼쳐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들을 더 믿고, 그 사람에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상황을 자꾸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창업가가 직원들에게 신뢰를 보내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들이 만든 시스템을 현장에 적용하는 것.
―창업해서 보람 있던 순간은.
직원들이 우리의 비전을 믿고 전력을 다해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보람이다. 각자 자신의 젊음과 소중한 시간들을 쏟아 붓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성과를 얻어내고 있다는 게 보람 있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겠다.
그렇다. 면접 볼 때 ‘우리는 아직 작은 기업이라 한 명이 들어왔을 때 우리 문화가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서로 잘 맞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다. 보통 면접은 1시간가량 진행되는데, 지원자보다 우리가 오히려 말을 많이 한다. 우리 회사가 이런 회사고, 이런 문화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랑 잘 맞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스킬적인 부분은 뻔한 부분이 많다. 디자인 쪽은 툴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디자이너들과 얼마나 잘 어울릴 수 있는지, 새로운 툴을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데 배움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지 등이 중요하다.
―롤모델이 있나.
스티브잡스가 롤 모델이다. 잡스는 자기의 방향을 꿋꿋하게 믿고 갔다. 돈을 벌어다주는 제품이더라도 다음 단계를 위해서는 다 버리는 추진력도 있었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관리 하나
그때그때 끌리는 운동을 한다. 예전에는 테니스를 쳤다. 공으로 하는 운동을 기본적으로 좋아한다. 야구도 좋아해 경기할 때는 내야수로 뛴다. 다만 골프는 안 친다.
성우석 ㈜콥틱 공동대표 △고려대 통계학과 △2002~2005년 삼일회계법인 △2009~2010년 IBK투자증권 IB본부 △2011~2012년 삼성증권 IB본부 △2015~현재 더메이크 대표이사 △2017~현재 콥틱 대표이사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