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4년 조사끝 발굴 일반인 주체 만세운동, 전체의 65%, 옥고 치르며 “우리 민족은 이겨낸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징역형을 받고 투옥된 24세 박영봉(왼쪽)과 17세 박하균. 23세 농민으로 “조선독립 만세”를 외친 문창환(오른쪽)은 1921년 중국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투사들에게 자신의 집을 은신처로 내준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3월 3일 정오 함경남도 함흥면 대화정 거리.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는 군중 사이로 열일곱 살 빡빡머리의 박하균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 “친구를 따라 나왔다”는 진술이 참작된 것. 평범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 순간, 그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감옥에서 고초를 겪는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해 4월 8일 박하균이 다시 거리에 나와 “조선독립 만세”를 외친 이유다. 이번에는 단순 가담자가 아닌 주동자로 낙인찍혔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은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이번에는 우리 목적을 멈출 수 있겠으나 고통받은 만큼 우리 민족은 이겨낸다. 정의를 위해 감옥에 갇히는 건 분하지 않다.”
3·1운동은 평범하게 살던 이들의 삶을 바꾼 결정적 순간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일반시민이 주체가 된 만세운동이 전체의 65%(1286건)를 차지했다.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TF(태스크포스)’는 4년의 조사 끝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인 장삼이사(張三李四) 1638명을 찾아냈다.
3·1운동 당시 31세로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농사를 짓던 이창하는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러시아와 중국을 오가는 독립운동 자금 모금책이 된다. 1929년 중국 간도에서 자금을 모으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병보석으로 석방된 게 그의 마지막 기록이다. 훗날 월남한 이원군민들이 엮은 글에는 이창하의 말년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자가 돼 갖은 천대를 받다가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41세에 병사했다.’
27세 이발사였던 최용주는 3·1운동에 참여했고, 2년 뒤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의 은신처로 내준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평안남도 강계군 고향에서 37세 간호사로 3·1운동에 나선 김관순은 3년 뒤 비밀결사를 조직하다 적발됐다. 그는 1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6년 동안 고향 주민에게 의료봉사를 했다. 김도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3·1운동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한 분들 덕분에 한국 독립운동사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