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안에 미국 달러도 러시아 루블도 전혀 없다.”
1일(현지 시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한 현금인출기를 이용하려던 20대 시민 안톤 씨는 영국 BBC에 현금인출기가 텅 비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루블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 루블조차 없다며 “이러다 우리가 북한이나 이란처럼 될까 봐 두렵다”고 했다. 곳곳의 현금인출기에서는 달러를 빼내려는 사람들이 며칠째 장사진을 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의 경제 제재로 루블 가치가 사상 최저로 폭락하고 주요 은행의 연쇄 파산(뱅크런) 가능성이 대두하면서 러시아 사회가 대혼란에 빠졌다. 특히 소련 붕괴 후 오랜 경제난으로 이미 1998년 ‘모라토리엄(지불 유예)’을 맞은 터라 경제 위기 재연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하다. 국제금융협회(IFF) 역시 지난달 28일 러시아가 달러 발행 채권에 대한 디폴트(채무상환불이행)를 선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내다봤다. 국가 부도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당국은 지난달 28일부터 러시아인이 해외 은행 계좌로 자금을 이체하는 것을 금지했다. 나라 밖으로 돈이 빠져나갈 구멍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난해 말 1달러에 75루블 내외였던 루블 가치는 현재 105~110루블대로 급락했다. 상당수 러시아인은 구글페이, 애플페이 등 미 정보기술(IT) 기업이 개발한 모바일 결제 서비스로 교통비를 냈지만 연계 은행이 미 제재를 받은 터여서 이 또한 사용이 불가능하다.
당초 러시아는 6300억 달러(약 758조 원)를 보유한 세계 5위 외환 보유국이라는 이유로 서방 제재에도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돈이 서방 주요국에 있어 당장 꺼내 쓰기가 어렵다. 미 재부무가 러시아 중앙은행을 제재해 중앙은행의 현금 120억 달러 역시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러시아가 보유한 중국 국채(840억 달러·약 101조 원), 금(1390억 달러·약 167조 원) 등을 현금화하려 해도 역시 서방 제재로 구매자가 나타나기 힘들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카이로=황성호 특파원 hsh033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