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바시키르체프 ‘우산’, 1883년.
검은 옷에 검은 우산을 쓴 여자아이가 정면을 응시하고 서 있다. 수심 가득한 눈빛과 발그레한 볼에서 경계심과 불안감이 느껴지지만 꼭 다문 입술에선 단단함도 읽힌다. 이 인상적인 초상화는 19세기 말 파리에서 활동했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마리 바시키르체프가 그렸다. 그림 속 소녀는 대체 누구기에 이국에서 온 화가의 시선을 끌었던 걸까?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바시키르체프는 12세 때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유럽 여러 도시를 떠돌다 파리에 정착했다.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었기에 20세 때 사립미술학교인 쥘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는 여학생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2세 때부터 살롱전에 매해 출품하며 이력을 쌓았다. 이 그림은 그녀가 25세 때 그렸다. 모델은 지역 보육원에서 만난 고아 소녀로 화가가 남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검은 치마를 입고 어깨 위로 펼쳐진 우산을 든 소녀를 그리고 있다. 밖에서 그리는데, 비가 계속 내린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비 오는 날, 야외에서 그린 것이다. 왜 그림의 색감이 칙칙한지 소녀의 표정이 어두운지가 설명된다. 화가는 우산과 옷을 검은색으로 단순하게 표현한 반면, 소녀의 얼굴은 밝은 톤으로 세밀하게 묘사했다. 소녀의 표정이 그림의 핵심인 것이다. 보호자도 없이 부서진 우산을 들고 빗속에 서 있는 고아 소녀를 보고 바시키르체프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위대한 예술가의 꿈을 품은 이방인 여성 화가로서 세상의 편견에 맞서 홀로 당당하게 싸우는 자신에 대한 투영은 아니었을까.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