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교수(사진)가 지난달 26일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은 언론인, 대학교수, 작가, 비평가 등으로 활약하며 ‘시대의 지성’으로 불려왔습니다. 초대 문화부 장관(1990∼1991년)을 지내며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보였습니다. 이때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원을 설립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고인은 1988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총지휘하며 상상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문화를 창의적으로 융합해 세계에 감동을 전했습니다. 그가 기획한 개회식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충남 아산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약관을 갓 넘은 22세에 기성 문단을 신랄하게 비판한 평론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등장했습니다. 문예지 추천 관행을 깨고 신문 지면을 통해 등단한 파격이었습니다. 이름난 원로 몇 명이 문단을 좌우하던 1950년대 기성 문단의 권위에 도전한 패기가 돋보입니다.
그는 디지털이 아날로그 세상과 접목해야 힘을 얻으며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역설하며 ‘디지로그’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대립과 경계를 넘어서는 융합적 사유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자는 뜻을 내포합니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생전에 이어령 교수를 ‘너무 잘 돌아가기에 마치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람개비’로 비유했다고 합니다. 박학다식에 달변가였던 이어령 교수는 ‘앉는 그 자리가 곧 강의실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는 생애 60년여 년 동안 130여 종이 넘는 책을 냈습니다.
지난해 1월 출간된 인터뷰 책 ‘이어령, 80년 생각’에서 고인은 “나를 키운 8할은 ‘물음표’였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삶이었어. 누가 나더러 ‘유식하다, 박식하다’고 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지. 나는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거든.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겨도 나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 어제와 똑같은 삶은 용서할 수 없어. 그건 산 게 아니야. 관습적 삶을 반복하면 산 게 아니지.”
선생은 생애 마지막에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공유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아름다움을 깨우쳐주고 싶었나 봅니다. “고통마저도 생명에겐 아름다운 거예요. 어떤 절망의 시대에도 생명의 힘은 놓치지 않았으면 해요.” 그의 마지막 말에 짙은 여운이 남습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