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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신진우]고심 끝 뒷북 러 제재, 버스 떠나고 손 흔드나

입력 | 2022-03-04 03:00:00

신진우 정치부 차장


지난달 중순 어느 날. 외교안보를 축으로 핵심 당국자들이 모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갈등이 일촉즉발 상황으로 치닫고 전운까지 감지되자 정보를 공유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무거운 대화가 이어졌고, 공기는 어느 한 대목에서 더욱 무거워졌다. 미국이 리드하는 ‘예견된’ 대(對)러시아 제재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머리를 맞댄 대목이었다. 고려할 변수가 많고 사안이 복잡해 판단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나름의 깊은 논의를 거쳐 옵션은 대략 두 가지로 줄기가 정해졌다. 하나는 바이든 미 행정부의 제재에 시작부터 적극 발을 맞추자는 것. 다른 하나는 동맹국들 기조에 결을 맞추되 가급적 ‘후발 주자 모드’로 가자는 구상이었다. 중간은 없었다. 어정쩡한 동참은 미국의 점수도 따기 어렵고 괜히 러시아와의 관계만 악화시킬 거라고 봐서다.

결국 정부 방침은 후자로 기울었다. 어차피 미국과 서방 주요국이 제재를 가하면 우리도 수동적으로 영향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굳이 공개적으로 제재 의지를 밝혀 크렘린궁을 자극하는 게 무슨 실익이 있느냐는 목소리가 반영됐다. 경제적 부담도 고려됐다. 괜히 제재 최전선에 나섰다간 에너지 수급, 공급망 확보 등을 두고 러시아에 선봉에서 두들겨 맞을 거란 우려가 나왔다. 종전선언 희망을 놓지 않은 정부 입장에선 대북 관계도 러시아를 챙길 명분이 됐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이 판단은 결과적으로 패착이 됐다. 바이든 행정부의 거듭된 제재 동참 시그널에도 원론적 입장만 밝히며 모호하게 흐리던 정부는 지난달 24일에서야 처음 제재 동참 의지를 밝혔다. 버스 떠나고 손 흔든 꼴이란 지적이 나왔다. 동맹 전선에서 소외되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경제적 부담도 커졌다. 미국은 새로운 대러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하며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 면제 국가를 정했는데 한국은 뺐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정부는 뒤늦게 “일본보다 더 센” 대러 제재안을 내놨다. 통상교섭본부장은 황급히 미국까지 날아가 제재 협의에 나섰다. 미국은 “환영한다”며 품을 열었다. 하지만 뒤에선 우릴 보는 시선이 싸늘하단 게 워싱턴 조야의 중론이다. 러시아 소식에 정통한 인사는 “뒤늦게 제재한다고 달려드니 더 눈에 띈다. 러시아도 한국을 벼르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결국 늦장 제재로 명분과 실리 모두 잃은 건 일차적으로 정세 판단 미스에 따른 상처로 봐야 한다. 미국은 영국, 호주와 맺은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에 전달한 수준으로 대러 수출 통제안을 우리 정부에 공유했다. 제재 동참 메시지를 수차례 발신했다. 우린 이를 잘못 읽거나 간과했다. 동맹국 뒤에 숨기 힘들 만큼 미국의 제재가 고강도로 진화할 거란 판단도 제대로 못 했다.

그나마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략적 모호성’의 시대가 다했다는 값진 교훈을 체득한 건 불행 중 다행이다.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폭격 버튼은 신냉전의 본격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민주주의 진영은 경고한다. 무임승차 승객에게 자리는 없다고. 또 묻고 있다. 한국은 어디에 설 거냐고.

신진우 정치부 차장 nice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