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한반도 진출의 기틀을 마련하지만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제동이 걸린다. 중국 산둥성 류궁다오 ‘갑오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한 모습. 동아일보DB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년 동안 연재해온 ‘한일 역사의 갈림길’이란 제목의 연재를 마치고 오늘부터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란 연재를 새로 시작한다. 20세기 일본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는,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근현대 한국은 그것에 배우고 저항하며, 그것에 당하고 이겨내며 만들어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일본사는 낯선 대상이다. 밉고 불쾌해서 공부를 회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선진국이 된 마당에 한국 시민도 20세기 일본을 냉정하게 직시해 볼 때가 되었다.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 시민의 시각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어디까지 성숙했는가를 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20세기 일본사 연재는 한국 신문상 최초의 시도일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을 바란다.》
문명 실어나른 대한해협
오늘은 첫 회니 일본사의 전반적인 배경과 20세기 전야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일본과 중국 대륙의 관계를, 영국과 유럽 대륙 관계와 비교하는 주장이 있다. 사뭇 다르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해협은 33.3km에 불과한 데 비해 중국 서남해안과 나가사키 사이에는 광활한 동중국해가 가로놓여 있다. 게다가 동중국해는 파도가 거칠어 왕래가 매우 힘들었다. 일본은 겨우 7세기, 8세기나 되어서야 수나라, 당나라에 대규모 사신(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을 파견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 중국 대륙과의 거리야말로 일본사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틀 지은 제1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것만이었다면 일본은 낙후된 거대한 섬으로 남았을 거다. 그러나 동중국해는 광활했지만, 대한해협은 좁았다.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는 200km 정도인데 중간에 쓰시마라는 큰 섬이 있었다. 게다가 온화한 바다였다. 한반도가 정력적으로 흡수·소화한 중국 문명은 쉽사리 현해탄을 건넜다. 넓은 동중국해는 중국의 침략을 막아주었고, 좁은 대한해협은 중국·조선의 문명을 날라다 줬다.
자급자족과 고립 택한 日
이처럼 일본은 중국 대륙과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 그 문물은 한반도를 통해 ‘안전하지만 큰 시차를 두고’ 흡수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일본에는 수준 높지만 고립적이면서도 특수성이 강한 문명이 성장했다. 면적은 19세기 중엽 편입된 홋카이도를 빼도 한반도나 영국보다 훨씬 넓었고, 토양이나 기후도 매우 좋아 농업생산력이 높았다. 나라의 규모나 생산력이 고립적으로 살아가도 별 문제가 없었다. 임진왜란 후 성립한 도쿠가와 시대는 특히 그랬다. 이 시대 일본의 국가전략은 자급자족과 고립이었다.
18세기까지는 비단, 도자기, 차 등 중국·조선에서 수입하던 상품들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한국인에게 유명한 쓰시마의 왜관무역도 비중이 날로 줄어들었다. 또 도쿠가와 시대 250년 동안 일본은 서울이나 베이징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적이 없다. 사절은커녕 부산 왜관을 제외하고 일본인은 열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명한 쇄국정책이다. 남서쪽 유구 왕국(현 오키나와)은 규슈 남부의 사쓰마번(薩摩藩)을 통해 간접 지배했고, 더 이상의 욕심은 내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직전 유구의 직접지배를 주장하는 논자들이 나타났으나 막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방에는 광활한 에조지(蝦t地·현 홋카이도)가 있었다. 여기서도 남단 하코다테에 마쓰마에번(松前藩)을 두었을 뿐, 더 이상의 북진은 시도하지 않았다.
메이지유신 이후 노선 전환
일본이 청에 할양받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한다는 내용이 담긴 회담록.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선을 사이에 두고 힘을 겨루는 일본과 러시아를 풍자한 그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