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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도시계획에도 차별과 편견이 묻어 있다

입력 | 2022-03-05 03:00:00

◇부동산, 설계된 절망/리처드 로스스타인 지음/김병순 옮김/504쪽·2만5000원·갈라파고스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조선소가 우후죽순 들어서자 곳곳에서 근로자들이 몰렸다. 5년 새 인구가 5배 가까이 폭증하자 연방정부는 흑인과 백인 공영주택을 갈라놓는 주거 정책을 내놓았다. 흑인 공영주택은 일터에서 차량으로 1시간 넘게 떨어진 외곽에, 백인 공영주택은 도심 깊숙한 곳에 지어졌다. 그래도 살 곳이 부족하자 연방정부는 백인 가구에 ‘빈방 임차권’을 부여했다. 은행은 백인이 집을 개조할 수 있도록 융자를 제공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백인들이 자산을 불리는 동안 흑인들은 임차인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거 정책이 차별적으로 계획된 탓이었다.

저자는 미국에서 흑인을 대상으로 한 주거 분리 정책이 만들어지고 고착화된 과정을 살펴본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소 연구원이자 주거 정책 전문가인 그는 누구나 그럴 거라 짐작했던 주거 격차의 근원을 각종 법률과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드러낸다. 국가가 자행한 차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의회는 물론이고 은행과 부동산 업계, 교육당국도 흑백 주거 분리 정책에 공모했다. 1934년 미 의회가 설립한 ‘연방주택관리국(FHA)’은 백인에게는 주택 값의 80%에 이르는 담보대출을 내주고 20년간 분할 상환을 허락했지만 흑인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부동산 개발업자들 사이에서는 ‘흑인에게는 부동산을 팔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가 팽배했다. 지역 교육정책위원회는 흑인과 백인 거주 지역에 각기 다른 학교를 세웠다. 주거 격차가 빈부의 대물림은 물론이고 교육 격차로도 이어지게 된 것.

저자는 ‘흑백 통합 주거지원 프로그램’ 등 대안을 제시하면서도 이미 벌어진 격차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주거 차별은 노골적으로 벌어진다. 예컨대 같은 아파트 단지인데도 임대주택은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지어진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한 아파트 단지가 둘로 쪼개져 학교 배정에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흑백 주거 분리로 초래된 부작용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저자의 고백을 우리도 새겨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