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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구소련 감시체제로 가나…‘전쟁’ 표현 쓴 방송사 송출 중단

입력 | 2022-03-06 13:42:00

AP뉴시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한 언론 보도를 ‘허위 정보’라고 칭하며 강력한 처벌을 예고하자 서방 언론들이 줄줄이 러시아에서 ‘탈출 러시’를 벌이고 있다. 러시아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도 비슷한 이유로 접속을 차단했고, 오래 전부터 당국의 탄압을 받아 온 러시아 내 독립 언론들도 잇따라 문을 닫거나 활동을 중단하고 있다. 자국 내에 비등하는 반전(反戰) 여론을 잠재우고 정권의 흔들림을 막기 위해 러시아가 구(舊) 소련 시절 같은 공포의 ‘감시 사회’로 향하고 있다.

5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은 전날 성명을 내고 러시아 내에서 뉴스 보도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존 미클스웨이트 편집장은 “독립된 기자를 범죄자로 바꿔놓은 법 개정 때문에 이 나라 안에서 정상적인 저널리즘을 닮은 어떤 것도 계속하기가 불가능해졌다”고 밝혔다. 미국 CNN방송 역시 이날 “러시아에서 보도를 중단할 것”이라며 “현지 상황과 다음 조치를 계속 검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영국 BBC방송도 ‘허위 정보’에 관한 러시아 당국의 검열로 인해 보도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밖에 미국 CBS·ABC방송, 캐나다 CBC방송 등도 러시아에서의 보도 활동을 제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워싱턴포스트(WP)도 러시아 모스크바 특파원들이 작성한 일부 기사에 대해서는 기자 이름과 날짜를 가리기로 했다. WP는 “이는 특파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미디어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러시아 당국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가장 강력한 것으로 평가되는 언론 통제 조치를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러시아 의회는 4일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수 군사 작전’이 아닌 ‘전쟁’으로 규정하거나 러시아군의 작전 차질이나 민간인 죽음을 보도하는 언론인에게 3년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이런 행위가 국가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을 경우엔 15년형까지 내리도록 하는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러시아 내 서방·독립언론들의 보도를 모두 ‘허위정보 유포’라고 간주하고 보도 활동을 막겠다는 뜻이다. 이 법안은 푸틴 대통령의 서명만 있으면 발효된다. 러시아는 또 BBC방송을 비롯해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미국의소리(VOA), 자유유럽방송(RFE),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DW)의 자국 내 접속을 차단했다.

러시아는 소셜미디어 통제 또한 시작했다. 러시아의 미디어 감독당국인 로스콤나드조르는 4일 “페이스북이 RT 등 러시아 국영 매체의 접근을 제한하는 등 26차례의 차별 사례가 있었다”는 이유로 자국 내 페이스북 접속을 제한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페이스북은 러시아에서 큰 인기가 있지는 않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국영방송에서 접할 수 없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장소가 돼 왔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트위터에 대해서도 접속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부터 언론 자유의 제약을 받아왔던 러시아 내 독립 언론사들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거의 사라질 위기를 겪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지난주 이번 사태에 대해 ‘침공’, 또는 ‘전쟁’이라는 표현을 쓴 독립 방송사 ‘도즈디TV’와 ‘에호모스크비’의 송출을 중단시켰다. 도즈비TV의 편집장과 그의 가족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를 떠나기도 했다.

러시아의 이런 강경책은 우크라이나의 침공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이 높은 상황에서 국내에서만이라도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풀이된다. 러시아의 언론자유지수는 세계 180개국 중 150번째에 이를 정도로 원래부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이 정도의 이례적인 언론 탄압은 그만큼 푸틴에게도 급박하다는 신호로 보인다는 것이다. 전 세계 주요 도시는 물론, 심지어 러시아와 동맹국 벨라루스에서도 매일 같이 크고 작은 반전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도 푸틴에게는 상당한 압박이 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정보전쟁 차원의 반격을 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언론 통제가 과거 소련 시절의 양상과 비슷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니얼 호프먼 전 미 중앙정보국(CIA) 모스크바 지부장은 폭스뉴스에 “소련 시절에 당국은 조지 오웰의 ‘1984’처럼 사람들의 눈과 귀에 대해 완전한 통제를 했지만, 이는 성공하지 못했고 금지된 정보나 서적이 계속 들어오곤 했다”면서 “러시아인들은 영리하기 때문에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