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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배극인]러 디폴트 위기

입력 | 2022-03-07 03:00:00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는 1991년 구소련에 대규모 경제협력 차관을 제공했다. 구소련 해체 후 러시아가 채무를 승계했지만 1998년 모라토리엄(지불유예) 선언으로 돈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아시아 외환위기 여파로 러시아 외환보유액도 바닥났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한때 150%의 고금리를 유지하며 국가부도를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세월이 지나 한국은 원금 일부를 무기와 헬리콥터로 받아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24년 만에 다시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다. 미국 등 서방이 러시아 은행을 국제은행결제망에서 퇴출하고 경제제재를 쏟아내면서 루블화 가치가 급락했다. 러시아는 미리 외환보유액을 쌓아 놓고 위안화, 금 등으로 보유 자산을 다각화했지만 역부족이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러시아 신용등급을 한 단계 낮춘 데 이어 지난주 다시 8단계 강등했다. 무디스와 피치도 한꺼번에 6단계나 낮췄다. 피치의 신용등급 6단계 강등 조치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에 적용한 이후 처음이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은 신흥시장 지수에서 러시아 증시를 제외했다.

▷24년 전과 달라진 점은 국가부도를 대하는 러시아의 태도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 맞서 고의로 부도를 내는 ‘디폴트’(채무 불이행) 선언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혼자 죽지 않겠다는 물귀신 작전이다. 물론 이미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러시아 경제는 파국을 맞게 된다. JP모건은 올해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7% 둔화할 것으로 봤다. 국가부도가 난 1998년과 2008년 금융위기에 맞먹는 수준이다.

▷죽어나는 것은 러시아 국민이다. 루블화가 폭락하고 물품 수입이 막히면서 초인플레이션과 고금리로 인한 고통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자구책으로 암호화폐를 사들이고 있다. 루블화를 통한 비트코인 거래량은 작년 5월 이후 최대치다. 하지만 주요 7개국(G7)과 유럽연합은 러시아 개인과 기업의 암호화폐 거래도 차단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2000년 5월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후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장기 집권의 초석을 닦았다. 비결은 고유가였다. 오일머니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중산층이 두꺼워졌고 국방력과 외교력을 강화했다. 이번에도 그가 믿는 구석은 원유와 가스다. 유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생명줄인 에너지 제재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누가 오래 버티느냐는 치킨 게임이 벌어지는 이유다. 당장 달러가 없으면 에너지 수입이 막히는 한국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러시아의 배짱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