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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왜 여론전에서 우크라에 완패했나[특파원칼럼/문병기]

입력 | 2022-03-07 03:00:00

세계가 SNS 통해 전쟁 참상 목격
사회책임 중시 기업들도 러 보이콧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군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호소합니다. 만약 적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공식 봇(Bot)으로 보내주세요.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보기관 텔레그램 채널에는 매일 이런 안내문이 올라온다. 러시아군 이동이나 공격 시간과 지점, 포격 영상 등을 정부 공식 인공지능 메신저 계정으로 보내 달라는 요청이다.

이 덕분에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어지는 러시아군의 만행은 하루에도 수백 건씩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무차별 포격에 나선 러시아군이 민간인 주거지역을 폭격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크라이나 정부 기관들이 운영하는 메신저 프로그램을 통해 폭격 영상과 사진, 민간인 피해 규모까지 실시간으로 확산된다. 전 세계를 가슴 철렁하게 했던 러시아군의 유럽 최대 원자력발전소 자포리자 원전 포격은 아예 원전 시설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의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다.

온라인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러시아군의 만행만이 아니다. 항복을 선언한 뒤 우크라이나인들이 건넨 빵을 허겁지겁 먹다가 러시아에 있는 어머니와의 영상 통화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흐느끼는 러시아군의 SNS 영상에선 가해자마저도 피해자가 되는 전쟁의 비정함이 전해진다. 자신을 걱정하는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영상을 SNS에 올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인의 모습에선 두려운 현실 속에서도 딸에게 희망을 주려는 애틋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다.

전 세계가 우크라이나인들의 눈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함께 겪고 있는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TV 연설에 나서 러시아의 안보 위협과 우크라이나인들의 친(親)러시아 지역에 대한 ‘제노사이드(인종학살)’를 주장해 봐야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가 화두인 기업들도 앞장서서 러시아 시장을 등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 수입 중단에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등 에너지 기업들은 탈러시아를 선언했다. ESG를 무시해선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운 시대인 셈이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를 지지해온 중국은 물론이고 러시아 제재에 소극적인 인도 등에 대한 세계 여론의 시선은 싸늘하다. 인도태평양 전략보고서에서 인도를 중국 견제를 위한 지역 중심국이 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힌 조 바이든 행정부는 ‘쿼드(QUAD)’ 정상회의를 열고 인도를 압박했다.

한국이 뒤늦게 러시아 제재 동참을 선언하는 과정도 아쉬운 구석이 적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과 실무회의까지 열면서 러시아 동참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푸틴 대통령이 진군을 명령하는 상황에서도 제재 동참에 거리를 뒀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당시 러시아 제재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러시아 시장을 넓힌 경험이 이 같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도 나온다. 국익을 앞세웠던 정부는 러시아의 무리수 앞에 결국 뒤늦게 제재 동참을 선언했지만 한동안 미국 수출통제 면제 국가에서 제외되며 체면을 구겼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신냉전 시대의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새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책임과 국익이 충돌하는 사례가 적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눈앞의 이익에 매몰돼 바뀌는 국제질서에 눈감았다간 자칫 명분도 실리도 잃기 십상이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