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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유물에 빛 밝히는 자”…시간을 만지는 사람들

입력 | 2022-03-08 09:52:00


법당을 빠져나오는데 옆에 딸린 작은 방의 문 틈새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방 안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 심장이 멎을 듯했다. 높이가 1.2m에 이르는 석조비로자나불상(石造毘盧遮那佛像)이 목에 금이 간 채 덩그러니 놓여있던 것. 법당에는 이 불상을 받치던 1m 높이의 대좌가 놓여있었다. 확인해보니 대좌는 1977년 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됐으나 목이 잘린 불상은 뒷방으로 밀려난 신세였다.

1997년 국립전주박물관의 3년차 큐레이터였던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59)은 전북 임실군의 한 법당 뒷방에 방치된 불상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1년간 조사한 결과 9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이 확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열린 제1회 동원학술대회에서 불상의 존재를 알렸다. 그 덕에 해당 불상은 2003년 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소외된 유물에 빛을 밝혀주는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던 풋풋한 큐레이터는 어느덧 퇴임을 앞둔 박물관장이 됐다.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7일 만난 그는 “지난해 해당 불상을 다시 찾아가보니 이제야 대좌에 올라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큐레이터 되길 참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최 관장은 1991년부터 큐레이터로 지낸 경험을 담은 에세이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주류성)를 3일 펴냈다.

국립전주박물관, 춘천박물관, 중앙박물관을 거치며 굵직한 특별전을 기획한 그는 유물의 진가를 드러내는 법을 고민해왔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구기획부장을 지내며 그가 기획한 ‘영월 창령사 오백나한 특별전’이 대표적. 득도한 500명의 성자 나한(羅漢)을 형상화한 오백나한상은 역사만으로 특별했다. 강원도 영월 깊은 산속에서 2001년 농부가 처음 발견했다. 이후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년에 걸쳐 나한상 317점을 발굴했다. 상당수는 머리가 없거나 머리만 남은 채였다.

“화강암으로 만든 거칠고 소박한 나한상에 어떤 힘이 있기에…. 500년간 땅속에 묻혔지만 결국 빛을 봤어요. 유물이 가진 힘에 대해 고민했죠.”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은 부처의 말씀이었다. 미술작가와 협업해 전시장에 스피커 740개를 탑처럼 쌓아올려 사이사이 나한상을 설치했다. 스피커에서는 물소리와 함께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속세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고요 속에서 자신 안의 소리를 성찰하라는 의도였다. 전시가 끝난 2020년 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큐레이터가 그를 찾아왔다. “뉴욕에서도 오백나한을 전시하고 싶다”는 것. 목이 잘린 채 땅속에 묻혀있던 나한상은 2023년 뉴욕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

퇴임사를 쓰듯 책을 썼다는 그는 “30여 년간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한 내가 같은 길을 가려는 이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하나”라며 이렇게 말했다.

“단 한 점의 유물이라도 다르게 보자는 거예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바닥과 모서리를 보세요. 유물에 새로운 가치를 찾아 비춰주면 역사 한 장이 더해져요. 큐레이터는 유한한 직업이지만 이 발견은 유물의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겁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