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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헤르손은…“점령군 마을 포위, 인터넷·전화 자주 불통”

입력 | 2022-03-08 15:13:00


© News1

“점령군이 마을을 포위하고 지인의 집을 지휘소로 사용하기 위해 가족들을 모두 내쫓았습니다. 저도 불필요한 저항을 하지 않으려고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지난 3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헤르손을 점령하자 박희관 씨(37)가 대피한 지하 벙커에는 더 짙은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손에서 놓지 못했던 차가운 총도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아야만 했다. 러시아군과 맞닥뜨렸을 때 총을 가지고 있으면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5일(현지시간) 박희관씨가 머물고 있는 지하 벙커 입구에 무장 해제한 총이 놓여 있다. (독자 제공)© 뉴스1

전쟁으로 시작된 벙커 생활 2주째. 그간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던 인터넷과 휴대전화도 불통이 되는 일이 반복되자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지인이 재산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기고 농장 사무실에서 지낸다”며 “무슨 일이 생길지 누구도 모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헤르손 내 개인 벙커에 머물고 있는 박씨는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7일까지 메신저와 전화를 통해 뉴스1에 소식을 전해왔다. 지난 3일 러시아군이 헤르손을 점령하면서 전쟁은 더 가까이서 그를 위협하고 있다. 뉴스1은 박씨가 전쟁터 한가운데서 틈틈이 보내온 생의 기록을 글과 사진으로 정리했다.

박씨는 “전차부대가 시내를 점령했을 때 제가 머무는 곳도 사정권에 들어 긴장했다”며 “지금도 멀리서 포성이 계속 들린다. 강 건너에서 계속 무언가를 쏴대 제 농장이 큰 타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현재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박씨가 운영하는 농장 직원들까지 모두 11명과 함께 지하 벙커에 머물고 있다. 벙커는 처가에서 전시를 대비해 미리 만들어둔 시설로, 집과는 5분가량 떨어져 있다. 박씨가 농장 직원들의 가족들까지도 직접 불러 모아 함께 생활 중이다.

그는 “초등학생 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용돈을 주시며 ‘너보다 더 힘든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사먹고, 학용품을 안 가져온 친구들이 있으면 꼭 사서 나눠쓰라’고 하셨다”며 “우리집엔 내가 없어도 친구들이 놀러와 어머니가 차려주신 음식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는 친구들도 있었다. 부모님이 제게 가르쳐주신 건 지금 이런 전쟁 같은 삶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5일(현지시간) 박희관씨가 머물고 있는 지하 벙커 내부 모습. 박씨가 운영하는 농장 직원들과 직원 가족들까지 11명이 대피 중이다.(독자 제공)© 뉴스1

박씨가 머무는 벙커는 현재 전선을 연결해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11명이 효율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성은 부엌일과 청소로, 남자는 힘을 쓰는 일로 업무를 나눴다. 박씨는 “장인어른과 저를 포함해 남자 한 명은 항상 기상 상태”라며 “비상상황에 긴급피난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상 상황이 아니면 지하 1층에 마련한 더블 매트리스 6개에 2인 1조로 취침하고 이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부엌과 화장실도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식량 문제는 마을 주민과 서로 도와가며 해결하고 있다. 그는 “시내 상점에 빵이 보급돼 가구당 하루에 두 개씩 나눠준다”며 “저희는 집에서 계속 빵을 구워 자급자족해왔고 이웃들과 식용유나 빵을 나누며 생활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점령을 본격화하면서 전쟁은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다. 박씨는 “며칠 전 함께 머무는 직원 가족이 추워서 옷을 줄 수 있냐고 묻는 러시아 병사에게 작업복 외투를 주셨다더라”며 “감사하다고 인사하던 러시아 군인은 영락없는 젊은 청년이었다”고 말했다.

또 “어제(4일)는 지인이 약국에 들렀다가 목이 아파 약을 사러 온 러시아군을 만났다”며 “제가 만약 러시아군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긴장을 비집고 전쟁이 익숙해지는 순간이 느껴질 때 박씨는 두려운 감정이 든다고 했다. 벙커에서 함께 생활 중인 9살 남자 꼬마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면서도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5일(현지시간) 박희관씨가 머물고 있는 지하 벙커 내부에서 직원 자녀의 천진난만한 모습. (독자 제공)© 뉴스1

박씨는 “다 잘될 거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다가도 포성이 크게 들리면 아내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며 “외 증조모께서 외할머니에게 전해주신 기도문을 외할머니와 아내가 함께 읽으며 기도를 드린다”고 말했다.

날이 갈수록 살은 빠지고 체력은 떨어지고 있다. 제 몸을 간수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도 서로가 서로를 돌본다. 아내의 할머니가 집에 두고 온 강아지 끼니를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고 강아지와 고양이·닭을 돌보기 위해 차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다.

박씨는 떨리고 무섭더라도 끝까지 가족들을 지키겠다고 했다. 한국에 있는 아버지는 박씨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가족을 위해 헌신적 생활로 일념 해라. 강한 신념과 집념·희망을 가져라. 애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