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현지 시간) 독일에서 열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반대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푸틴과 히틀러의 얼굴을 합성한 ‘푸틀러’ 그림이 담긴 전단을 들고 있다. 뒤셀도르프=AP 뉴시스
신광영 국제부 차장
“직원들에게 일을 시킬 때 시킨 대로 처리됐으면 그걸로 그만이었어요. 어떤 방식으로 처리됐는지, 도중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따지지 않는 분이죠.”
원하는 결과만 나오면 과정은 묻지 않는 푸틴의 성격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어졌다. 2002년 10월 모스크바 극장 테러사건이 났을 때다. 푸틴이 체첸을 침공해 초토화시키자 체첸 테러범 41명이 뮤지컬 관람객 912명을 인질로 잡고 철군을 요구했다. 푸틴의 지시로 착수된 그날 진압 작전에는 마취가스가 동원됐다. 건물 환기구를 통해 가스가 살포됐다. 인질범과 인질들 모두 의식이 혼미한 상태가 되자 특수부대가 진입해 테러범을 전원 사살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러시아 연방군과 벨라루스군의 합동군사훈련을 지켜보며 쌍안경을 들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지도자의 이런 기질적 결함은 정치적 심판을 면할 수 없다. 하지만 푸틴은 전쟁을 벌일 때마다 제국에 대한 향수와 열패감에 젖은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도 러시아 내에 반전 시위가 열리긴 하지만 국민의 60%는 여전히 푸틴을 지지하고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결과를 달성하고 과정은 비밀에 부치는 KGB식 통치를 하면서도 푸틴은 도전자의 싹을 잘라내면서 승승장구해 왔다. 흙수저 출신에서 자수성가해 ‘국민의 대통령’이 됐다는 자기 확신, ‘대러시아 복원’이라는 시대착오적 소신, 서방의 존중을 받지 못했던 상처와 그로 인한 피해 의식이 결합되면서 푸틴은 90년 전 히틀러의 모습으로 21세기 시민들과 맞서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모스크바에 있는 군사장비 전시장에서 저격용 소총을 살펴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 옆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그런데 푸틴은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 그는 서방 제재에는 단단히 대비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복병을 만났다. 가족을 폴란드 국경에 내려주고 다시 돌아와 총을 잡는 아버지들, 빈병에 스티로폼 가루를 밀어 넣으며 화염병을 만드는 여성들, 망치라도 들고 싸우겠다는 노인들, 생포된 러시아 병사들에게 따뜻한 수프를 먹이며 그들의 가족과 영상통화를 연결해주는 사람들 말이다. 푸틴이 침공 직전 연설에서 “국가로서 정체성을 가진 적이 없다”며 얕잡아봤던 나라의 국민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똘똘 뭉쳐 있다.
러시아 접경 우크라이나 동부 루간스크 최전방 진지에서 1일 우크라이나 병사가 푸틴 대통령 얼굴 사진이 붙은 과녁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있다. 얼굴 사진 곳곳에 총탄 구멍이 보인다.
물론 푸틴은 대량살상무기를 쏟아부어 기어코 군사적 승리를 달성하려 할 테지만 그렇게 이겨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4000만 명이 넘는 우크라이나인들 가슴에 뿌려진 원한은 끝없는 저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서방에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경제·군사적으로 일치단결하는 명분을 줬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장악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인 전면 침공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질 국제질서 파괴, 주권 침해, 민간인 살상은 늘 그래왔듯 개의치 않았다. 그 결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과정’의 반격에 직면해 있다. 푸틴이 더 큰 만행으로 이를 돌파하려 한다면 기름을 끼얹어 불을 끄려는 꼴이 될 것이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