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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중현]‘정치 손해’ 감수하는 리더가 ‘경제 미래’ 연다

입력 | 2022-03-10 03:00:00

盧·李 정치위험 무릅쓴 한미 FTA 추진
힘든 결정들이 ‘10위 경제강국’ 만들어



박중현 논설위원


“다음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안 할 것 같았다. 정치적 손해가 가는 일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선언한 뒤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14개월간 이어진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노동계, 농민의 반대시위가 이어졌고 반미(反美) 성향 지지층이 이탈했다.

2007년 12·19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고 5일 후 열린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경제부처 장관들은 “우리 정부가 시작한 일이니 쇠고기 수입 문제까지 털고 가자”고 주장했다. 그해 초 광우병과 관련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한국이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자 미국이 반발하면서 한미 FTA 협상은 결렬 위기를 맞았다. 3월 노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전화해 문제 해결을 약속하고 4월에 협상이 타결된 만큼 그 약속을 지키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날 회의의 결론은 ‘쇠고기 문제는 차기 정부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나를 여기서 더 밟고 가려고 합니까”라며 감정이 격해져 눈물까지 내비쳤다고 회의 참석자들은 전한다.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기로 마음 먹었어도 막상 정권이 교체되자 노 대통령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다.

결국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최대 정치 리스크가 됐다. 이 대통령은 한미 FTA 비준을 앞당기기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을 결정했다가 취임한 지 몇 달도 안 돼 광화문 촛불시위에 직면했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들을 바라보며 이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곧이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한미 FTA에 부정적인 오바마 정부의 태도 때문에 지연되다가 결국 임기를 1년여 남긴 2011년 말 한나라당이 국회 비준동의안을 단독 처리해 이듬해 3월 15일 발효됐다.

다음 주 발효 10주년을 맞는 한미 FTA의 성적표는 흠잡을 데가 없다. 한국의 대미(對美) 수출액은 10년 전보다 70% 늘었고, 이 기간 대미 연평균 수출액 증가율은 6%로 전체 수출액의 3배 속도였다. 자동차, 반도체 수출이 급증했고 원유 수입은 늘었다. 최대 걸림돌이던 농축수산물은 수입이 30% 증가하는 동안 수출이 82%나 급증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작년 수입 쇠고기 중 55%로 광우병 공포는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노무현이 판을 깔고 이명박이 마무리한 한미 FTA의 과실은 뒤이은 정부들이 거뒀다. 너무 좋은 성과 때문에 탈까지 났다. 미국 쪽의 큰 무역적자를 문제 삼은 트럼프 정부는 한미 FTA를 깰 것처럼 하면서 개정을 요구했다. 2012년 대선 때 ‘한미 FTA 재협상’을 공약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 자동차 수입 등에서 일부 양보하면서까지 FTA를 지키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은 이렇게 좌파, 우파 정부의 정치적 수난을 거름 삼아 만들어졌다. 하지만 10년 번영의 주춧돌이 됐던 ‘FTA 선도국가’ 한국의 위상은 요즘 흔들리고 있다. 미중 경제패권 전쟁, 강대국의 자국 이기주의로 인한 신(新)냉전 속에서 한국은 어느 편에 설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국내적으론 노동, 규제, 연금 개혁 등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20대 대통령 당선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 중 어느 하나 녹록한 게 없다. 그렇더라도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이 그랬듯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디뎌야 한다. 정치적 손해, 때로는 눈물까지 감수해야 하더라도.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