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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실 짜장면 그립다”던 천생 검사… 정의 회복 앞세워 靑입성

입력 | 2022-03-11 03:00:00

[20대 대통령 윤석열]윤석열 당선인이 걸어온 길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검찰총장이던 지난해 3월 이 같은 사퇴의 변을 남기고 26년 검사 생활을 마감했다. “검찰에서 제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했던 윤 당선인은 석 달 뒤 “부패하고 무도한 세력으로부터 정권교체를 이뤄내겠다”며 정치 참여를 선언했다.

취임하면 대한민국의 13번째 대통령이 되는 윤 당선인은 현대 정치사에 여러 기록을 남기게 됐다. 1987년 개헌 이후 국회의원 경력이 없는 최초의 ‘0선’ 대통령이자 처음으로 도전한 선출직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에 오르는 것도 처음이다. 검찰 출신이, 또 서울대 법대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도 모두 처음이다. 첫 서울 출신 대통령이기도 하다.


○ “너는 공… 눈사람 구르듯 커질 것”


윤 당선인은 1960년 12월 18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와 최성자 씨의 1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윤 명예교수는 소득 불평등을 연구해 온 경제학자다. 아들의 서울대 법대 입학을 기념해 윤 교수가 선물한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선택할 자유’는 윤 당선인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다.

대광초, 충암중, 충암고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윤 당선인은 유년 시절 여유와 뚝심, 의리와 원칙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정립하게 됐다. 이런 윤 당선인을 눈여겨본 고교 친구 신용락 변호사는 1977년 11월 윤 당선인에게 “너는 둥근 공이라 이리저리 내키는 대로 갈 수 있다. 너는 눈사람 구르듯이 커질 것이다”라는 편지를 썼다.

1979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사법시험 도전은 순탄치 않았다. 윤 당선인은 1982년 첫 도전을 했지만 ‘9수’ 끝에 1991년 합격했다. 그는 훗날 “시험을 앞두고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대구 가는 고속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에서 펼쳐본 형사소송법에 ‘비상상고’ 내용이 있었다”고 합격 이유를 회상했다. 비상상고는 형사 확정 판결에서 법령 위반이 발견됐을 때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신청하는 비상구제 절차다. 윤 당선인은 “내가 총장이 되고 나서 비상상고를 역대 (총장 중) 가장 많이 했다”고 말했다.

윤 당선인은 1994년 대구지검에서 검사로서 첫발을 뗐다. 2002년 검찰을 떠나 변호사 생활을 했지만 약 1년 만에 접었다. 윤 당선인은 “검찰청사를 들렀다가 야근 검사실에서 나는 짜장면 냄새가 그리워 다시 검찰로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검찰에서 윤 당선인은 권력층, 기업 비리 수사를 맡아 이름을 알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자금 수사에서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을 구속 기소했다. 2006년 현대자동차 비자금 수사 때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구속 기소했다.

후배들로부터 ‘검찰 총각 대장’이라는 의미로 ‘총장’이라고 불렸던 윤 당선인은 2012년 3월 11일 52세의 나이로 코바나컨텐츠 대표인 김건희 씨와 결혼했다. 결혼식장 역시 대검찰청 예식장이었다. 11일 윤 당선인 부부는 결혼 10주년을 맞게 됐다.


○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윤 당선인의 검찰 생활은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기점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당시 수사팀장이던 그는 2013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야당 도와줄 일 있나, 야당이 이걸 갖고 정치적으로 얼마나 이용을 하겠느냐’라고 말했다”라며 수사와 관련된 외압을 폭로했다. 이 자리에서 나온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검사 윤석열’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표현이 됐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윤 당선인은 2014년 대구고검 검사로 밀려난다. 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부인 김 씨는 유산까지 했다. 검찰 인사가 있을 때마다 사의설이 돌았지만 그는 지인들에게 “잘못한 게 있어야 거취를 밝히지, 잘못한 사람들이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데”라며 스스로 검찰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 ‘살아있는 권력’ 겨누다 정치의 길로


윤 당선인은 2016년 12월 국정농단 특검 수사팀장으로 부활했다. 당시 그는 박영수 특검의 지휘를 받아 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과 호흡을 맞춰 국정농단 사건 수사를 이끌었다.

탄핵 정국을 거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윤 당선인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겪었다. 적폐청산을 앞세웠던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 직후 윤 당선인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한다. 이후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었던 한 부원장과 함께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을 구속 기소하는 수사를 이끌었다. 약 2년 뒤인 2019년 7월 문 대통령은 윤 당선인을 “우리 윤 총장”이라고 부르며 검찰총장으로 임명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승승장구했던 윤 당선인은 정작 검찰 수장이 된 뒤 곧바로 격랑에 휘말렸다. 문 대통령의 ‘페르소나’로 불렸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비리 의혹, 부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의 사모펀드 의혹 등을 둘러싼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월성 원자력발전소 경제성 조작 의혹 수사까지 밀어붙였다. 모두가 여권의 핵심 인사 및 정책과 연관된 수사들이었다.

2020년 1월 취임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이런 윤 당선인을 통제하려는 뜻을 감추지 않았다. 윤 당선인의 측근들은 뿔뿔이 지방으로 흩어졌고, 그해 11월 사상 초유의 검찰총장 직무집행 정지 명령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추 전 장관을 앞세운 여권의 압력이 강해지면서 역설적으로 윤 당선인은 문재인 정권과 맞서는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됐다.

결국 헌법정신을 강조하며 검찰총장직을 던진 그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여론을 등에 업고 본격적인 대선 준비에 나선다. 이번 대선 레이스에서 윤 당선인 측이 “국민이 불러낸 윤석열”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유다.

윤 당선인은 평소 존경하는 인물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를 꼽는다. 인생의 주요 고비마다 그의 리더십을 떠올린다고 한다. 당 내홍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올 1월 지하철역 출근길 인사를 나갈 때도 “처칠처럼 국민만 보고 정치할 생각”이라고 했다. 윤 당선인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 동안 “국민의 정직한 머슴이 되겠다”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10일 승리의 ‘어퍼컷’을 날렸다. 지난해 6월 29일 정치 참여를 선언한 지 254일 만이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