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의 밤/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778쪽·1만9000원·민음사
2017년 미국 뉴욕에 있는 서재에서 생각에 잠긴 오르한 파묵. 그는 1983년 ‘고요의 집’과 1985년 ‘하얀 성’에서도 전염병 이야기를 다뤘다. 그는 전염병에 맞선 인간 군상의 심연에서 공포와 불안은 물론이고 생의 의지를 보았다. 민음사 제공
1901년 오스만 제국의 속주로, 에게해에 연접한 가상의 섬 ‘민게르’에 페스트가 퍼진다. 제국에서 파견된 무슬림 총독은 페스트보다 이후 격변할 세상이 더 두렵다. 인구 8만 명의 자그마한 섬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반반씩 살아간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페스트로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도 성전에 소독제를 뿌리는 건 신성모독이라고 여긴다.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의 무지한 행태가 섬을 전멸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부자들이 모두 떠나버린 섬에는 빈민들만 남는다. 해묵은 종교분쟁을 피하려고 총독이 페스트를 방관하는 사이 전염병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거장 오르한 파묵(70)의 11번째 소설은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쓴 현실과 조응한다. 2020년 5년간의 집필을 끝낼 무렵 코로나가 확산됐다고 한다. “현실이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는 저자의 말처럼 방역에 대한 불신이 횡행하는 소설 속 풍경은 현실과 닮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전염병은 세계화 이후 이슬람 사회 깊숙이 퍼진 서구 문명에 대한 공포를 상징한다. 저자는 페스트로 위기에 빠진 민게르섬을 통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유지할 것인지, 서구화로 회귀할 것인지 갈림길에 선 터키의 현실을 녹여냈다.
전염병으로 인한 두려움은 곧 현실이 된다. 하루 사망자 수가 50명대로 늘자 제국은 섬을 봉쇄한다. 죽은 자와 죽을 자만 남은 섬….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종교를 떠나 무차별로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가 섬을 하나로 결속시킨다. “신 앞에서 죽음을 거역할 수 없다”며 방역에 불복한 이슬람 성직자마저 페스트로 목숨을 잃자, 무슬림 마을에서는 우리를 지키는 건 신이나 제국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믿음이 싹튼다.
도시의 밤거리에는 시신의 옷가지를 소각하는 불길이 타오른다. 소각장 주변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슬피 우는 사람들이 있다. 오른쪽 사진은 17세기 중엽 페스트가 퍼진 도시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망자의 시신을 옮기는 모습. 위키피디아·런던 웰컴도서관 제공
페스트의 밤을 밝힌 건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민게르섬 출신 장교 콜아아스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이들을 향해 “우리는 민게르인”이라고 외친다. 제국에 버림받고 절망하던 이들은 그의 한마디에 각성돼 방역 선을 구축하고 섬을 독립시킨다. 나고 자란 고향을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이 만들어낸 힘이다. 이후 페스트가 종식되기 전까지 정권 교체로 혼란을 겪지만 종교를 떠나 모두가 민게르인이라는 믿음은 이어진다. 이슬람 근본주의 혹은 서구화의 갈림길에 선 민중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주체적 독립 국가를 세우는 길로 나아간다.
저자가 소설의 화자로 민게르섬 출신의 여성 사학자 ‘미나 민게를리’를 택한 것도 뜻깊다. 그의 증조부모는 “교리를 어기고 살아남는 건 무의미하다”는 이슬람 성직자를 향해 “살아남아 미래를 지켜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맞선다. 이들이 끝내 살아남은 덕분에 사학자로 성장한 증손녀가 섬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서로를 저버리지 않고 함께 살아남았기에 삶과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메시지는 2년 넘게 ‘코로나의 밤’을 지나온 우리를 위로하는 듯하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