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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들판의 종소리… 지친 이에게 위로와 치유가 되는 건축[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입력 | 2022-03-12 03:00:00

경기 화성 건축여행




《잘 지어놓은 건물은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건축과 공간의 힘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공간에서 색다른 체험을 한다. 종교건축도 마찬가지다. 깊은 산속의 사찰이나 유럽의 대성당에서는 종교와 관계없이 명상을 하며 위로와 안식을 얻고, 치유의 힘을 얻기도 한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왕릉이 있는 경기 화성은 한때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배경이 됐던 과거도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공간이 속속 들어서면서, 건축과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으는 여행지가 되고 있다.》



●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모여드는 남양성모성지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기념관.

계곡의 끝에 우뚝 솟은 거대한 두 개의 기둥. 10만 평 규모의 화성 남양성모성지 입구에서부터 멀리 보이는 대성당은 순례자의 발걸음을 끌어들인다. 숲과 돌, 조각품이 어우러진 산책길에는 엄마의 치마를 붙잡고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서 있는 한국적 성모자(聖母子)상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붉은 벽돌에 화강암 줄무늬. 고딕성당처럼 우뚝 솟은 외관과 달리 내부로 들어가면 펑퍼짐하고 아늑한 공간이 펼쳐진다. 52m의 원통형 타워는 ‘빛의 기둥’이다. 타워를 비스듬히 잘라낸 천장의 유리창 격자를 통과해 내려온 빛은 제대 벽면에 시시각각 달라지는 무늬를 그려 넣는다. 여름의 하지 때는 그림자가 기다란 천사의 날개처럼 정확히 바닥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은 60만 장의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서울 강남 교보타워와 한남동 리움미술관을 설계한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79)의 작품이다. 르코르뷔지에, 안도 다다오의 종교건축에서처럼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의 건축에서도 빛은 핵심 요소다.

줄리아노 반지가 그린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의 제대화 ‘수태고지’(위)와 ‘최후의 만찬’.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충격을 던져주는 것은 ‘21세기 미켈란젤로’로 불리는 이탈리아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91)의 십자고상과 성화(聖畵)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일반적인 예수상과 달리, 두 눈을 뜨고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예수상을 보며 사람들은 낯설고 충격적인 인상을 받는다. 십자가 뒤에서 거꾸로 박은 날카로운 못은 손과 발을 뚫고 나와 45도가량 하늘로 솟아 있다. 이상각 주임신부는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못이 아니라 빛이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천장에 줄로 매달려 있는 ‘최후의 만찬’과 천사가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 ‘수태고지’를 그린 성화는 신기하게도 뒷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청바지 같은 현대인의 남루한 옷차림을 한 주인공들을 그린 ‘최후의 만찬’ 뒤편으로 돌아가면, 예수와 제자들의 뒷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누군가 나를 배신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에 제자들이 수군대며 서로 손가락질하는 순간의 소란스러움과 쓸쓸한 예수의 뒷모습이 큰 울림을 준다. ‘수태고지’ 그림의 뒷면에는 한복을 입은 여성 모습도 그려져 있다.

경기 화성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은 빛과 소리의 공간이다. 단풍나무 패널이 촘촘히 박힌 성당 지붕에 빛이 들어오고 있다.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건축에서 또 하나의 놀라움은 바로 ‘소리’다. 성당의 천장과 벽을 둘러싸고 있는 이중의 벽은 막혀 있지 않고 뚫려 있다. 그 사이를 단풍나무 패널이 촘촘히 에워싸고 있다. 마치 거대한 오디오 스피커나 악기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다. 유럽의 성당의 기원은 동굴이었다. 사방이 막힌 동굴에서 공명되는 음악은 울림이 좋지만, 사람의 목소리 발음은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보타가 지은 대성당은 충분한 울림과 명확한 소리 전달이 이뤄지도록 설계돼 있어 오케스트라, 실내악, 오페라, 대중가요 공연 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대성당의 전면 두 기둥 사이에 있는 7개의 종도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7개의 종은 각각의 음계가 있어 망치로 두드릴 때마다 멜로디가 생음악으로 연주된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 시간에 한 번씩 종소리가 연주하는 음악은 ‘파티마의 성모’ 찬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종지기 콰지모도가 밧줄을 당겨 종을 울렸는데,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에서는 작은 망치가 두드리는 7개의 종소리 음악이 화성의 들판으로 조용히 퍼져나간다.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풍경이다.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외관. 김용관 건축사진가 제공

남양성모성지에는 앞으로도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어가 짓는 명상과 치유의 공간인 ‘티 채플’과 이동준 건축가가 설계한 연극, 영화,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는 ‘평화 문화 나눔센터’, 승효상 건축가의 ‘순교자의 정원’이 들어서고 산책길과 조경도 다듬어질 계획이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일반 관광객이나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도 고즈넉한 공간에서 명상과 산책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1989년부터 남양성모성지 조성 작업을 해온 이상각 신부는 “이곳은 교황청에서 선정한 세계 30곳의 성모성지 중 하나”라며 “지난해 여기서 열린 팬데믹 종식을 위한 로사리오 기도회가 전 세계에 중계됐다”고 말했다.

또 남양성모성지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매향리 평화생태공원에는 보타가 설계한 기념관과 전망대가 완성돼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 찜질방 리모델링한 소다미술관

찜질방을 리모델링한 화성시 안녕동 소다미술관.

드라마 ‘그해 우리는’의 촬영지로 유명한 화성시 안녕동 ‘소다미술관’은 짓다 만 불가마 찜질방, 목욕탕을 리모델링해 만든 미술관이다. 숲과 논두렁에 오랫동안 방치된 콘크리트 벽체는 해가 갈수록 을씨년스러운 우범지대로 변모했다. 그런데 8년 전 이곳이 하버드대 건축대학원 출신 건축가 권순엽, 미국에서 디자인 컨설팅을 전공한 장동선 씨 부부에 의해 소다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불가마의 내화벽돌은 바닥길이 됐고, 찜질방으로 짓던 콘크리트 벽체는 지붕 없는 야외 전시장(Roofless Gallery)이 됐다. 이곳에서 정원 전시회가 진행되는가 하면, 여름에는 높은 곳에 설치된 파이프에서 물을 비처럼 내리게 하는 ‘스카이 샤워(Sky Shower)’가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다.

화성시 최초의 사립미술관이 된 소다미술관 내부로 들어가 보면 냉탕, 온탕, 기둥 같은 목욕탕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남탕이 있던 자리는 살짝 밑으로 꺼져 있는데, 그 아래로 내려가서 벽에 설치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은 남다르다. 2층의 루프톱 전시장이 된 여탕으로 올라가 보면 컨테이너 건물 너머로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다미술관 장동선 관장은 “원래 이 동네는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배경지로 낙후된 지역이었다”며 “주변이 재개발되고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많이 찾아 문화적으로 지역이 환하게 변모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 융릉과 건릉, 혜경궁베이커리

경기 화성의 한옥카페 혜경궁베이커리.

융건릉은 뒤주에 갇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정조의 화려한 행차의 목적지였다. 사도세자로 알려져 있는 추존왕 장조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헌경 왕후)가 모셔져 있는 융릉, 정조와 효의 왕후가 합장돼 있는 건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근에는 왕릉을 지키는 용주사(龍珠寺)가 있다. 용주사 입구에는 왕릉 입구에나 있는 홍살문이 있어 엄숙함을 더하고, 용주사 대웅전 뒤편에 있는 호성전에는 사도세자와 정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혜경궁베이커리(화성시 정남면 보통내길)는 3층짜리 대형 한옥 건물에서 빵과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다. 본관 1층에서 빵과 커피를 주문한 후 정자, 화빈관, 수빈관, 놀이터, 산책로 등 넓은 야외 공간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야경도 아름답다.






화성=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