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정확히 보는 눈은 배신하지 않는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자화상, 1910년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민 기자입니다.
국제부에서 일하는 저는 요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최대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내 의지와 관계 없이 일상을 파괴 당하고 집을 떠나야만 하거나, 억울한 피해를 입는 장면들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러시아는 왜 그럴까? 푸틴은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하는데요.
마침 러시아의 20세기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어 직접 다녀왔습니다. 이 시기 러시아 예술이라고 하면 칸딘스키, 말레비치, 그리고 구성주의를 떠올리게 되죠.
말레비치는 정치적 압박을 피해 우크라이나로 이주한 폴란드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 러시아의 공습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자랐는데요.
이후 러시아로 이주해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가 되었다가 말년에는 감옥에 갇히고 예술 작품 제작을 금지 당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고 난 뒤 수십 년이 지나 미술사에 남을 불멸의 작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말레비치가 어떻게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을 예술 세계를 구축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시대를 정확히 읽은 눈으로 불멸이 되다
1. 말레비치는 프랑스의 입체파와 이탈리아의 미래파가 새로운 시대의 예술이라는 것을 정확히 읽었다.
2. 이 두 가지 예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과감히 밀고나가 절대주의를 선언하고 예술 작품으로 선보였다.
3. 이후 스탈린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의 예술은 반혁명적인 것으로 낙인 찍히고 탄압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진가를 인정 받아 불멸의 예술이 되었다.
○ 검은 사각형 때문에 식음을 전폐한 남자
(먼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말레비치 작품은 아래 두 점 밖에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다른 작품은 작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가져온 자료입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피아노를 연주하는 여인, 1913년, 캔버스에 유채, 67 x 44.5 cm
카지미르 말레비치, 절대주의, 1915년, 캔버스에 유채, 80 x 80 cm
말레비치 작품이 아주 적은 숫자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대표작을 직접 볼 수는 있었습니다. 바로 위 사진에 있는 ‘절대주의’입니다.
전시장에서는 말레비치와 함께 절대주의나 구성주의 작업을 했던 류보프 포포바, 알렉산드로 로드첸코, 엘 리시츠키 등 동료 작가의 작품이 함께 걸려 있었습니다.
위와 같은 기하학적 추상이 잔뜩 걸린 공간에 들어서자 한 커플 관객의 반응이 재밌었습니다. ‘이게 뭐야’하는 난감한 웃음이 터진 두 관객은 귓속말로 “다음으로 넘어갈까?” 했거든요.
아무런 맥락 없이 이 작품들을 맞닥뜨리면… 저라도 당황스럽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레비치의 대표작을 소개해드리면 더 난감한 웃음이 터질 것 같습니다. 말레비치의 대표작은 바로 ‘검은 사각형’이기 때문이죠. 말 그대로 캔버스에 검은 사각형을 그린 것입니다.
보여드릴게요.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1915년
어떤가요?
이 비슷한 작품을 해외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 때 그림 앞에 서서 작품을 자세히 뜯어보기가 민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냐면 정말, 그냥 말 그대로 검.은.사.각.형.이니까요. 그 외에 구도가 어떻고 색감이 어떻고…이런 걸 말할 거리가 전혀 없는 그림입니다.
굳이 찾자면, 물감이 많이 갈라졌네….정도요? 근데 이건 시간이 오래 지나 자연스레 생긴 현상이니 사실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말레비치는 그럼 어떤 의도로 이 검은 사각형을 그린 걸까요? 그가 이 그림을 그릴 무렵 알고 지낸 동료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이 자신의 예술 커리어에 아주 중요한 작품이 될 것임을 직감했지만, 아직 그것의 의미를 온전히 머리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것을 말로 정리해내기 위해) 그는 1주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잠을 자지도 않았다.”(Anna Leproskaia)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검은 사각형의 의미를 ‘언어로 정리하기 위해’ 식음 전폐를 했다는 사실인데요. 이 황당한 그림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건지,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 그림은 곧 생각이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의 무대 디자인. ⓒ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연음악박물관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1907년 열린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의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할 때부터 어렴풋이 구상되었습니다. 위 그림은 1913년 오페라 공연의 무대 디자인인데, 태양(흰색)을 검은 사각형이 점령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죠.
그러나 이 형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가 남긴 글입니다.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 작품과 함께 이 예술을 미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글을 남깁니다. 1915년 ‘입체주의에서 절대주의까지’(From Cubism to Suprematism)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합니다.
그 중 1920년 발표한 글의 일부를 가져와봤습니다.
(영어 번역본을 한글로 옮겼고,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생략 및 의역한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흰 사각형을 그린 뒤 그것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행위 그 자체’의 의미를 서술할 수 있었다. (…) (또 검은 사각형의) 문제를 통해 세계속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 붓이 아닌 펜으로 이뤄짐을 실험하게 된다.
펜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붓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붓은 이미 낡았다. 마음을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펜이 더 날카롭다.
나는 사고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영역은 내게 새로운 것이며, 이를 통해 인간의 두뇌라는 무한한 영역을 탐구하고자 한다.”
우선 말레비치의 글 자체가 명료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포인트가 두 가지 있습니다. 바로 ‘펜’과 ‘사고의 영역’이라는 표현입니다.
제가 이해한 것을 풀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말레비치의 말을 비추어 봐야겠죠.
과거의 그림은 현실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복사하는, 지금의 ‘사진’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레비치는 그림은 그냥 종이 위에 물감일 뿐이고, 그것을 그림이라고 믿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 캔버스 위에 흰 색을 칠하는 것을 통해 말레비치는 ‘그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흰 캔버스 위에 칠해진 흰 색은 눈으로 보면 아무런 흔적이 없지요.
형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작가가 그것을 그렸다는 행위는 분명히 존재하는 진실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생각’이 그림 속 형태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말레비치는 하고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검은 색을 네모낳게 칠한 것은 말 그대로 ‘검은 사각형’에 불과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사각형을 그리고 이름붙인 행위입니다. 마치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너는 몸짓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죠.
그렇다면, 그림이 천조각 위해 물감에 불과하다고 선언한 것이 왜 중요하냐는 의문이 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 중요성은 시대적인 맥락에 있습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흰색 위 흰색(White on White), 1918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소장
20세기 초 유럽은 산업혁명을 비롯한 기술의 발전과 유럽 밖 고대 문명의 발굴로 빠른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이 수 백년 동안 고정된 가치 체계 내에서 정해진 삶을 살았다면, 이 때부터 개인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말레비치도 어릴 적 아버지가 사탕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 본 기억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뒤늦게 발견된 원고에서 그는 “공장 속 기계들이 커다란 생명체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이런 기계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매료된 이탈리아 작가들이 선언한 것이 ‘미래주의 예술’입니다. 이 작가들은 기계 문명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찬양하곤 했습니다.
여기에 정해진 하나의 관점이 아닌 다양한 관점을 허용하는 ‘입체주의 예술’이 더해집니다. 말레비치는 이 두 가지 예술 사조를 통해 절대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말하는데요.
조금만 상상력을 보태어 생각한다면, 즉 절대주의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예술의 가치를 선언한 예술이며, 그 가치는 과거의 고정된 것이 아닌 작가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임을 인식한 초기의 예술 중 하나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개인이 종교나 국가의 부속품이었던 과거와 달리, 개인이 갖고 있는 인식과 자아를 예술에서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관념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한 마디로 정리하면 말레비치는 예술을 통해 자신이 인식한 자아를 솔직하고 과감하게 선언했으며, 이를 통해 시대를 증언한 역사적인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 스탈린 정권이 들어서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발표한 후 국가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특히 1910년대 말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죠. 1919년에는 국가가 말레비치의 개인전을 모스크바에서 직접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또 1927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와 독일 베를린, 뮌헨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28~1930년에는 우크라이나 키이우 예술대학교 교수가 되어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과 뮌헨에서 전시를 연 말레비치는 작품을 대부분을 그 곳에 두고 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죽음과 레온 트로츠키의 추방이 자신의 예술에 우호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를 바꿀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스탈린 정권이 들어선 뒤 추상화는 ‘부르주아 예술’로 낙인 찍혔으며 러시아에 남아있던 말레비치의 작품과 원고는 압수당했습니다. 또 추상화 작품 제작을 금지 당하기에 이르죠.
개개인의 자아를 선언한 작품이 소련에 들어선 독재주의 정권에 어울리지 않았다는 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 21세기에도 독재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결국 말레비치는 자신이 선보였던 20세기의 가장 과감한 추상화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년의 그림은 완전히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고, 56세에 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에 남아 있던 그의 예술은 후대 예술가와 비평가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절대주의 구성, 1916년
그 미술사적 가치는 그의 작품을 압수하고 제작을 못하게 만들었던 러시아도 뒤늦게 인정을 했습니다. 말레비치가 1920년대 그린 검은 사각형이 뒤늦게 발견되고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이 소장을 했거든요. 이 작품은 러시아의 사업가가 구매해 미술관에 기증했는데, 10월 혁명 이후 가장 값비싼 기증으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또 위 사진에서 보이는 ‘절대주의 구성’은 2008년 6000만 달러에, 2018년에는 8500만 달러(약 1045억 원)에 경매에서 팔리면서 러시아 작품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말레비치를 지원했던 동료에 의해 뒤늦게 작품이 온전하게 세상의 빛을 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지원했던 비평가이자 컬렉터 니콜라이 카르드지예프가 20년 동안 시도한 끝에 1993년 네덜란드 망명에 성공하면서, 말레비치의 작품과 드로잉, 스케치, 원고 수백 점을 갖고 간 것인데요. 이 작품들은 2003년 구겐하임 베를린 회고전을 통해 관객을 만났습니다.
남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내고 시대를 정확히 직시했던 예술가, 그리고 그런 그를 이해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불멸로 만들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저도 주변에 그런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그런 사람을 지지해 줄 용기는 있는지 말레비치의 삶을 통해 되돌아봅니다.
한 줄로 보는 전시
러시아 아방가르드 맛보기. 입장권 가격에 비해 너무 적은 작품 수와 6개 중 2개 전시관이 영상으로 처리되어 아쉬움.
추천지수(별 다섯 만점) ★★☆
전시 정보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2021. 12. 31 ~ 2022. 4. 17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75)
작품수 75점
※‘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구독 신청 링크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51199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