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 3人이 기억하는 尹… “대범과 덤벙은 동전의 양면” “비호감 꼬리표 안타까워”
1979년 서울대 법대 1학년 A반 대성리 MT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제공=이철우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오랜 친구인 신용락 법무법인 원 변호사,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철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왼쪽부터)가 2월 18일 서울 강남구 법무법인 원 사무실에서 학창 시절 추억이 담긴 사진과 편지들을 들어보이고 있다. 지호영 기자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학창시절 친구 신용락 법무법인 원 변호사에게 보낸 1981년 2월 10일 편지. 사진 제공=신용락
-1981년 2월 10일 윤 후보가 보낸 편지는 어떤 맥락인가.
신 변호사: “대학교 2학년 말이었다. 석열이는 모의재판 여파로 강원 강릉에 피신을 갔다 오더니 ‘법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세상을 먼저 알아야겠다’고 했다. 철학과 사회과학, 역사를 공부하고는 칸트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석열이는 대학 2학년 무렵 삶의 철학을 굳혔던 것 같다. 지금까지 초지일관 다른 눈치안 보고 양심의 명령대로 살아왔다는 게 대단하다.”
신 변호사는 윤 후보와 서울 충암고, 서울대 법대 동기다. 판사 시절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수원지법 판사를 역임한 뒤 법무법인 원(대표 강금실·윤기원)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술을 잘 먹지 못해 윤 후보를 집에 데려다 주던 ‘뒤처리반’이었다고 한다.
-윤 후보는 어릴 적 어떤 사람이었나.
신 변호사: “석열이는 친구들에겐 ‘봉’이었다. 만나면 일단 자기 주머니부터 먼저 털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본인 돈이 모자라면 다른 친구들이 돈을 보태는 식이었다. 9수를 하는 동안 친구들, 10년 위아래 선후배들과 그렇게 지냈다. 후덕한 부모의 품성을 닮았다.”
이 교수: “석열이와 서울 대광초 1학년 1반에 같이 입학했을 때 나는 반에서 제일 작았고, 석열이는 제일 컸다. 작은 키를 걱정한 우리 어머니는 석열이에게 나를 보호해달라고 했고, 석열 어머니와도 절친이 됐다. 석열이는 리더십이 강했다. 학급신문 편집장을 했는데 보통 꼼꼼한 게 아니었다.”
신용락 변호사가 1981년 2월 10일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로부터 받은 편지와 윤 후보와 함께 찍은 서울 충암고 3학년 3반 3총사 사진. 지호영 기자
1979년 서울대 법대 1학년 A반 대성리 MT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오른쪽에서 세번째)와 블루스를 추고 있다. 사진 제공=신용락
-윤 후보가 성장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 교수: “아버님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존경스러운 분이다. 올곧은 원칙주의자이며 성실한 학자시다.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로 석열이가 법무부 징계를 받았을 때 아버님에게 ‘행정소송을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근데 아버님은 ‘에이, 안 되지. 그건 툭 털고 가야 한다’고 했다. 석열이도 소송하지 않았다.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때 광화문에서 ‘조국 퇴진’ 집회가 열렸다. 아버님과 식당으로 이동하려고 광화문 앞을 지나갔다. 사람들이 열렬히 윤석열을 응원했다. 그런데 아버님은 오히려 ‘나라가 분열돼 큰일이다’라고 했다. 그 정도로 치우침이 없는 분이다. 석열이도 아버님으로부터 그걸 물려받았다.”
이 변호사: “석열이 부모님에게 매년 1월 1일 세배하러 가는 85학번 후배가 있다.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공부를 할 때부터 그랬다. 석열이네는 양력설을 쇘다. 후배는 홀로 서울에 있으니 석열이 어머님이 밥을 해 먹였다. 후덕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집이다.”
부장판사 출신인 이철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윤 후보와 같은 스터디그룹에서 공부한 ‘9수 친구’ 서울대 법대 동기다. 윤 후보가 대구지방검찰청 초임 검사이던 시절, 이 변호사는 대구지방법원 초임 판사였고 윤 후보와 같은 하숙집에서 함께 지낸 술친구다.
-사시 9수를 해서 무능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신 변호사: 공부 방법은 비효율적이었다. 책 한 장 넘기고 째려보고, 갸웃하다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생각을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기억력이 기가 막혔다. 친구들 사이에선 ‘윤석열 정답설’이 있다. 어울렸던 친구들 기억이 헷갈릴 때 석열이는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석열이가 대선 후보까지 되는 걸 보고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의미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큰 그릇으로 태어났고 그걸 채우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윤 후보와 술은 어떤 관계인가.
이 변호사: “술을 많이 마시긴 했다. 신림동 고시생활 때 내가 ‘안주만 다 먹고 가자’고 하면 석열이는 후딱 남은 소주를 다 마시고 소주를 한 병 더 시킨 뒤 새로운 소주병을 비우기 전 반드시 안주를 다 먹고 또 안주를 시켰다. 그렇게 안주 주문과 소주 주문을 번갈아했다. 석열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1983년 2월 서울대 법대 37회 졸업식. 한경 외국계 금융회사 임원,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신용락 법무법인 원 변호사, 고(故) 윤홍근 변호사(왼쪽부터). 사진 제공=신용락
-‘쩍벌남’ ‘열차 구둣발 논란’ 등으로 윤 후보를 권위적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신 변호사: “학창 시절 쓴 일기장엔 ‘석열이는 덤벙덤벙 무분별하게 기분대로 행동한 거 같은데 속은 그게 아니다. 역시 그 녀석은 크다. 뭐 하나 할 놈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대범’과 ‘덤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본다. 편견이 없고 다른 사람 눈치를 안 보는 게 본인 품성이다. 마음이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소탈한 게 석열이다. 권위적이라는 것은 검찰총장 출신 때문에 막연히 덧씌워진 이미지다.”
-결혼은 왜 늦었을까.
신 변호사: “누구에게나 결혼은 운명이다. 석열이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같은 동네 여학생을 짝사랑하고 괴로워하던 순정파다. 아저씨 스타일로 친구와 술을 좋아하다 보니 여자친구에게 인기가 있을 리 없었다. 9수를 하고 검사 생활하며 지방을 돌아다니다 보니 결혼 적령기를 놓쳤다. 몽달귀신 되는 줄 알았는데 뒤늦게 띠동갑과 결혼하는 행운이 있었다. 주변에선 나이 차이가 커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석열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 나이에도 순정이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친구들이 보는 윤 후보의 부인 김건희 씨는 어떤 사람인가.
이 교수: “‘조국 수사’ 당시 석열이와 엄청 싸웠다. 2019년 9월 조국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 날이자 부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를 검찰이 불구속기소한 날이었다. 이미 석열이랑은 대화가 안 되는 상황이라 ‘청문회가 열리는 상황에서 기소한 것은 부적절했다’고 건희 씨에게 폭탄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건희 씨는 답장하기 싫었을 텐데도 ‘ㅠㅠ’라고 답장을 보내며 기분을 맞추려 했다. 그 후에도 강한 의견 차이를 드러내기보다 ‘기다려보시지요’ 하는 식으로 나를 진정시켰다. 화통하면서도 침착한 사람이다.”
서울 대광초 졸업식 사진.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왼쪽에서 두번째)와 재미철학교수인 고 김원유 교수(맨 왼쪽),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왼쪽에서 세번째), 이승우 담임선생님(맨 오른쪽). 사진 제공=이철우
서울 충암고 3학년 3반 삼총사였던 신용락 변호사, 윤기원 변호사,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왼쪽부터). 사진 제공=신용락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30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