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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튜브]“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우크라에 묻어주오”

입력 | 2022-03-15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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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80년대 구소련에, 2013년 이후 러시아에 저항해온 우크라이나의 작곡가 발렌틴 실베스트로우. 동아일보DB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쇼팽의 연습곡 12번은 ‘혁명’이라는 제목으로 불린다. 곡 시작부터 쏟아지는 듯한, 파도치는 듯한 양손의 성난 질주가 듣는 사람을 압도한다.

쇼팽은 183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이 곡을 썼다. 그해 고향인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난 그는 세계 음악의 수도로 불리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할 예정이었다. 그때, 바르샤바를 지배하던 러시아에 저항하는 혁명이 일어났고 러시아군이 들어와 이를 진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쇼팽은 러시아의 말발굽에 짓밟힌 고향 소식에 분노하며 이 곡을 써내려갔다. 러시아,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를 나눠 지배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청중은 ‘반란의 땅’에서 온 쇼팽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쇼팽이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게 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역사상 수많은 예술가들이 고국이 처한 슬픔과 수난을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음악가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41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러시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옛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이름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포위됐다. 소련 정부의 지시로 레닌그라드를 빠져나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7번을 써내려갔다.

이 곡은 이듬해 쿠이비셰프에서 초연되었고 8월에는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도 공연이 열렸다. 공연은 확성기로 시내 전역에 방송됐다. 식량 공급이 끊긴 시민들이 굶주려 죽어 가던 시기였다. 변주곡 형식인 1악장의 클라이맥스에선 타악기의 맹타 속에 기관총의 사격음과 전투기의 기총소사음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 생전 지인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1악장은 나치군의 침공에 분노해 쓴 것이 아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나치 침공 이전 이미 이 악장을 써내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악장은 나치의 침공에 대한 규탄이기에 앞서 나치와 스탈린의 억압통치를 아우르는 전체주의의 공포에 대한 규탄이 된다. 스탈린이 죽은 뒤 그의 지인들은 쇼스타코비치가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이 이미 파괴했다. 히틀러는 마무리만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소련 시기 우크라이나의 작곡가 발렌틴 실베스트로우(85)는 마음속의 깊은 갈등에 빠져 있었다. 실베스트로우는 소련 당국이 강요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영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서방 작곡가들의 급진적인 작곡 방식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마음속 깊은 상처가 더욱 깊어진 실베스트로우는 작곡가 연맹을 탈퇴했다. 공산주의 체제의 예술가에게 연맹에서 탈퇴하는 것은 사회적 매장을 뜻했지만 그는 이를 기꺼이 감수하고 작품을 발표할 희망 없이 묵묵히 오선지를 채워 나갔다.

이 작품들이 빛을 본 것은 소련이 붕괴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이루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의 작품은 처음 듣는 사람도 이해하기 쉽다. 그는 “나는 이른바 신음악, 새로운 음악을 쓰지 않는다. 내 음악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자 메아리다”라고 말한다.

2013년 우크라이나에서는 친러 독재자 야누코비치를 몰아낸 유로마이단 혁명이 일어났다. 실베스트로우는 이 혁명에서 처음 총상을 입고 사망한 세르히 니고얀에게 합창곡 ‘두 폭의 제단 그림(Diptych)’을 헌정했다. 19세기 애국시인 <첸코의 시 ‘유언’에 곡을 붙인 이 곡의 가사는 이렇다.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우크라이나에 나를 묻어주오/넓게 펼쳐진 평원 한가운데, 언덕 위의 묘지에/들판과 끝없는 초원, 드니프로의 강기슭을/내 눈이 볼 수 있도록, 내 귀가/거대한 강의 포효를 들을 수 있도록….’

지난달 24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이 우크라이나를 위한 콘서트에서 실베스트로우의 작품을 연주하며 이 용감한 나라에 대한 연대를 다짐했다. 실베스트로우는 9일 키이우에 안전한 상태로 있다는 안부가 전해졌다. 그러나 민간인 대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그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그는 이 거대한 비극을 소리의 서사시로 형상화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들을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은 앞으로도 그의 음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을까.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