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아영 문학평론가
일본의 극작가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호러SF 희곡 ‘산책하는 침략자’(이홍이 옮김·알마· 2019년)에서 망각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외계인의 침략이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동명의 영화로 제작하면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에서 외계인은 화려한 우주선에서 내려 신비로운 무기로 인간을 요란하게 죽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 몰래 기생하고 전염병처럼 퍼진다.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 ‘기생수’를 떠올리게 하지만 ‘산책하는 침략자’는 한층 철학적이다. 인간의 육체가 아닌 개념을 죽이기 때문이다.
바닷가의 작은 항구 마을, 사이가 좋지 않은 젊은 부부 신지와 나루미가 주인공이다. 축제에 갔다가 사흘 동안 행방불명됐던 신지가 자기 이름도 알지 못하는 백치가 되어 돌아온다. 외계인이 신지의 인격을 점령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하는 나루미는 엄습하는 불안감에 두려워한다. “그렇게 자기만 전부 리셋하고 오면 다야?” 안 그래도 별거 수준이었던 사이의 남편을 하나하나 가르치며 돌보기로 하면서도 나루미는 싸늘한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우린 이미 옛날에 끝났었어.”
더 큰 문제는 신지가 인간의 개념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에게서 그 개념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지는 하루의 중요한 일과라며 산책을 나가서는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며 지구를 엉망으로 만든다. 나루미의 언니에게서 ‘혈연’이라는 개념을 빼앗자 가족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하고, 병원 관계자에게서 ‘자아’라는 개념을 빼앗자 면회가 금지된 병실이 열린다. 그러나 어떤 개념의 상실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소유’라는 개념을 빼앗긴 마루오는 느껴본 바 없는 후련한 해방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사랑에 있어서는 어떨까.
인아영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