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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철부대’ 만든 제철 장인들[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2-03-15 03:00:00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철의 수요가 많았다. 각국은 최대한으로 철을 확보해 병장기와 갑옷을 만들어야 했고, 부족할 경우 농기구를 녹여 충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철의 안정적 확보는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신라는 일찍이 제철 기술을 확보해 철광을 개발하고 철을 직접 생산했다. 산출된 철은 국가 차원에서 직접 관리하였을 것이고 그것의 공급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지방을 장악하였으며, 또 일부는 주변국에 수출했다. 학계에선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친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원동력으로 제철 역량을 지목한다. 신라는 언제쯤 철을 제련하기 시작했고 또 어떻게 ‘제철강국’으로 발돋움했을까.


○ 신라 초기부터 철 생산 시스템화

경주 황성동 제철단지에서 조업하던 장인의 무덤에서 출토된 철제 말재갈(왼쪽 사진). 장인들의 무덤에서는 다양한 철기가 출토돼 그들의 지위가 낮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출토된 쇠도끼 거푸집. 흙으로 만든 이 거푸집은 일회용이며 여기서 산출되는 철기는 쇠도끼로 불리지만 실제 기능은 주로 땅을 가는 괭이였고, 때때로 여러 종류의 철기를 만드는 중간 소재로 쓰였다. 사진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1989년 8월 경주 황성동 주공아파트 신축 부지에서 유적 존재 여부를 확인하던 경주박물관 연구원들은 흙으로 만든 거푸집 조각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서기 3세기 쇠도끼를 만들던 거푸집이었다. 그간 미지의 세계로 남겨진 신라 제철 유적의 위치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1990년 4월 여러 기관이 공동으로 조사단을 꾸려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철기 생산의 여러 공정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차례로 드러났다. 석 달 뒤 조사단은 유적의 성격을 “주조와 단조 공정이 공존하는 신라 초기의 제철 단지”라 설명했고, 그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자 학계의 반향은 뜨거웠다.

그해 8월 말 경주박물관에는 일본에서 발신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 안에는 황성동 유적 시료 분석 결과서가 들어 있었는데, “자철광이 원료로 사용되었고 철에 비소(砒素)가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흥미로운 설명이 있었다. 우리나라 철광산 중 비소의 함량이 높은 곳은 울산 달천광산이므로 황성동 제철 단지에서 사용한 철광석 산지로 그곳이 지목됐다. 그 이후 최근까지 형산강변의 황성동 일대에서는 제철 유적과 함께 제철에 종사하던 장인들의 마을과 무덤이 발굴됐다. 그곳에는 신라의 성장을 떠받치던 제철 단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 유적은 신라가 초기부터 국가 차원의 철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에 “변진(弁辰)에서 생산된 철을 중국 군현에 공급한다. 마한, 동예, 왜(倭)도 와서 사간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로 보면 변진의 철 생산을 신라가 일찍부터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 낙동강 통해 곳곳에 철 공급

밀양 임천리 금곡 유적에서 출토된 철광석(왼쪽 사진)과 쇠찌끼. 쇠찌 끼는 제련 과정에서 나오는 불순물 덩어리다. 사진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황성동 유적이 발굴된 후 신라의 철 생산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 과정에서 소규모 제철 유적은 여러 곳 확인됐지만 황성동에 버금가는 제철 단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고분 속에서 출토되는 막대한 철기를 생각하면 그 많은 철제품 모두가 황성동 일대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한 의문 해명의 실마리가 1998년 낙동강 지류인 밀양강변에서 우연히 드러났다. 그해 12월 김해박물관 연구원들은 밀양으로 향했다. 황성동 제철 유적 발굴에 참여한 바 있는 손명조 실장이 조선시대 이래 철광이 운영된 밀양에 신라 제철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열흘간의 출장 기간이 끝나가도록 밀양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제철 유적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날 극적으로 제철 유적을 발견했다. 일행은 별 소득 없이 조사를 끝내고 커피숍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쇠찌끼(쇠똥)로 만든 수석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것이 나온 곳을 수소문한 끝에 사촌마을에 다다랐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다. 마을 어귀의 감나무 밭에는 제철 과정에서 나온 쇠찌끼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가마에 산소를 공급할 때 쓰인 송풍관 조각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부터 2차에 걸쳐 발굴한 결과 높은 열로 광석에 함유된 철을 뽑아내던 제련로 7기가 노출됐다. 주변에선 6∼7세기 신라 토기와 함께 쇠집게 등이 나왔다.

이 유적은 6세기 이후 신라가 직접 운영한 제철 단지의 일부였고 그곳에서 산출된 다량의 철은 낙동강의 수운을 통해 신라 곳곳으로 공급되었을 것이다. 그 시점의 신라는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을 표방하며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낙동강변의 제철 단지는 바로 신라가 그러한 담대한 포부를 실현하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 철 생산력이 전쟁 승패 갈랐나

사촌 유적 발굴을 신호탄으로 신라 영역 곳곳에서 제철 유적이 속속 발굴됐다. 특히 2012년에 발굴된 밀양 임천리의 금곡 유적은 신라 장인들이 어떻게 제철 작업을 진행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광산에서 옮겨온 철광석을 잘게 파쇄한 다음 열을 가해 철을 얻고 그 철을 다시 녹여 불순물을 제거해 순도 높은 철을 산출하는 공정, 망치로 두드려 철기를 만드는 공정 등을 담고 있는 여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와 함께 목탄을 굽던 가마터, 장인들의 무덤 등이 일정한 구역을 이루며 세트로 발굴됐다.

이러한 유적들이 보여주듯 신라는 막대한 철을 지속적으로 생산하였다. 그것을 기반으로 신라는 562년 낙동강을 건너 대가야를 수중에 넣었다. 이어 약 1세기 후에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꺾고 삼국통일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됐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차치하고라도 대가야와 백제의 경우 철 생산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직 대가야의 제철 유적은 제대로 발굴된 바 없다. 그와 달리 백제는 한성기에 충주와 진천에서 대규모 제철 단지를 운영하다가 475년 고구려에 빼앗긴 이후 새롭게 제철 단지를 만든 흔적이 없다.

아마도 백제는 동맹국 신라에서 철을 수입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점이 백제가 신라와의 경쟁에서 밀리게 된 결정적 요인이 아닐까.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좋았을 때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서로 사활을 걸고 싸우게 되었을 때 백제는 철 공급 부족에 시달렸을 공산이 크다. 이러한 가설이 장차 새로운 발굴과 연구를 통해 검토되어 삼국시대 각 나라의 철 생산과 유통 문제가 해명되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