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성(聖)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 행사가 17일 백악관에서 열립니다. 이런 비판이 나옵니다.
“지금 시국에 파티를 연다고?”
매년 3월 17일 뉴욕에서 펼쳐지는 성 패트릭의 날 행진. 아일랜드의 성직자 패트릭의 사망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에메랄드의 섬’으로 불리는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녹색 옷과 장신구 등으로 치장하고 축제를 즐긴다. 아이러브뉴욕 홈페이지
바이든 행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 총력전을 펴고 있습니다. 확전일로의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통령이 다른 한편에서 흥겨운 파티를 연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나올만합니다.
이런 분주한 움직임은 아일랜드계 조상을 둔 바이든 대통령의 ‘뿌리 사랑’을 보여줍니다. 성 패트릭의 날은 아일랜드 성직자였던 패트릭의 사망일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게는 최대 축제날입니다. 아일랜드의 상징색인 녹색 옷과 액세서리로 치장하고 맥주를 마시며 즐깁니다.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 100여개 도시에서 녹색 차림으로 행진하는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아일랜드 혈통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은 2021년 취임 후 첫 성 패트릭의 날을 맞아 마이클 마틴 아일랜드 총리와 함께 ‘화상 축하 파티’를 열었다. NBC뉴스
우리나라는 지도자급 인사들이 자신의 연고나 혈통을 거론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다인종 국가인 미국은 다릅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인종적 지역적 배경을 스스럼없이 공개합니다. 그 중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은 유달리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통령입니다.
아일랜드는 바이든 대통령 연설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웅으로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를 꼽습니다. 2020년 대선 유세 때는 히니의 시 ‘트로이의 해법’을 낭송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당선 축하 전화를 걸면서 ‘트로이의 해법’ 시구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부통령 시절의 바이든은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초청한 만찬에서 “내 아일랜드 외할아버지가 영국 개신교도들과는 말도 섞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그 중 한 명인 캐머런 총리와) 한 자리에 앉아 있다니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날 일이다”는 농담을 해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먼 친척들이 살고 있는 아일랜드 서북부의 소도시 발리나 지역에서 2020년 대선에서 승리한 바이든 사진을 내걸고 축하하는 모습. CNN
올해로 정치 생활 50년을 맞는 바이든 대통령은 ‘평민 조(Average Joe)’의 이미지를 쌓아왔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보통 사람 이미지를 밀고 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일랜드 혈통이 자리 잡고 있다고 정치학자들은 분석합니다. 미국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저소득층 노동자 세력을 대변해왔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 혈통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왼쪽)이 1961년 취임 후 첫 성 패트릭의 날을 맞아 미국 주재 아일랜드대사(오른쪽)로부터 아일랜드의 국화(國花)인 클로버를 선물 받는 모습. 존F케네디대통령기념관
바이든 대통령은 아일랜드 혈통을 강조하면서 ‘케네디 연상 효과’도 톡톡히 누렸습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는 아일랜드 혈통을 지닌 이들이 꽤 많습니다. 아일랜드 매체 ‘아이리쉬타임스’에 따르면 현대 역사만 봐도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이 친가 또는 외가 쪽에서 어느 정도든 아일랜드 혈통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흑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백인 외가 쪽으로 5대조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아일랜드 조상을 두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선명하게 ‘아일랜드계 대통령’으로 부각되는 인물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과 케네디 전 대통령이 공통적으로 아일랜드에 뿌리를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언론에서는 바이든을 “케네디 사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일랜드계, 가톨릭신자, 민주당 소속이라는 공통점 외에 개인사의 비극도 공유하고 있어 이런 비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정치인으로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교통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은 바이든 대통령은 케네디 가문의 비극과 연결되면서 ‘역경 극복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진한 아일랜드 사랑은 입방아에 오르기도 합니다. 국민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 대통령의 자격으로 뿌리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은 다른 인종 및 지역 출신들에게 소외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2020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대선후보 토론에서는 이민 문호 개방을 내세우며 “와스프(WASP·미국의 주류 계급인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는 아일랜드인을 깔보고 무시했다”고 주장한 것은 분열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백악관의 성 패트릭의 날 행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흥에 겨운 나머지 아일랜드에 대한 도를 넘는 애정 표현을 할까봐 주변에서는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