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광복절에 열린 대규모 집회 모습. 한국 정착의 대다수 시간을 광화문에서 보내며 최근 20년간 한국을 바꾼 생생한 역사의 현장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 행복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어제, 3월 16일은 내가 탈북해 한국에 도착한 지 20년째 되는 날이다. 중국의 한 지방공항에서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 속에 출국 심사를 통과하던 일, 하늘에서 내려다본 첫 한국 땅, 인천공항에서 탈북자라 신고하던 순간 등이 여전히 생생하다. 반년 전까지 북한 감옥에서 운신이 어려운 폐인이 되던 내가 새 삶을 선물 받은 날이다.
3개월의 조사를 마치고 사회에 나와 먼지가 가득 쌓인 실평수 7평 남짓한 영구임대아파트를 밤늦게까지 청소한 뒤, 이불도 없어 맨바닥에 누워 “이제 뭐하고 살까” 막막해하던 첫날 밤도 잊혀지지 않는다.
벼룩시장을 뒤져 찾은 첫 일은 8월 삼복에 군포화물터미널에서 컨테이너 속 와인 박스를 하루 종일 메고 나르는 일용직이었다. 첫날 일당은 4만5000원. 인력사무소에 10% 주고, 밥값과 교통비를 떼고 남은 3만5000원을 만지작거리며 “이제는 일만 하면 굶어죽진 않겠다”며 행복했던 기억도 난다.
중국에 있을 때 라디오에서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1300여 명이라는 말을 들었다. “빨리 가서 1500명 안에는 들어가자”고 결심했는데, 이후 체포돼 중국과 북한의 6개 감옥을 전전하다가 겨우 살아오고 보니 2000여 번째였다. “너무 늦게 와서 내가 갈 만한 자리는 없겠다” 싶었는데 이후 3만4000명이나 탈북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은 뒤늦게 온 탈북민을 만나면 “내가 참 빨리 와서 다행이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정착 초기 몇 년을 돌아보면 산에서 살다가 도시로 내려온 타잔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20년을 살다 보니 아스팔트 위에서 구두를 신고도 맨발로 숲속을 달리던 만큼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한국에서 탈북 기자로 불린다. 해외에서 태어나 현지 대학까지 마치고 한국에서 기자가 돼도 미국 출신 기자, 중국 출신 기자라고 부르진 않는다. 하지만 내게 붙은 출신의 꼬리표는 죽을 때까지 떨어질 것 같지 않다.
한국 생활 20년째라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살아보니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을 것 같다. 이 질문엔 밤새 말할 것 같기도 하고, 또 할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나는 혁명가의 꿈이 심장에서 펄펄 끓는 청년이었다. “내 생애엔 북한이 반드시 붕괴될 것이고, 그때면 다시 돌아가 고향 사람들을 선진국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한목숨 바칠 것이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언론인의 길을 선택할 때 북한이 가장 암살하고 싶은 사람으로 살겠다는 비장한 다짐도 했다. 지금은 후배들과 술자리에서 “20년이나 살 줄 알았으면 일찍 아파트나 사 놓았을 걸 그랬다”는 농담을 자주 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뜻을 이루지 못한 망명가로 생을 마무리할까 봐 가끔 겁도 난다.
서울에선 탈북 기자, 평양에선 한국 기자로 불릴 삶이 내키지는 않다. 그러나 “왜 목숨 걸고 여기에 왔는지 잊지 말라”며 불쑥불쑥 심장을 두드리는 무엇인가가 내 몸에 남아 있는 한 기꺼이 경계선에 서 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바뀔 수 없는 내 운명인 듯싶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