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결정하면서 속전속결 승리를 자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예상 밖으로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러시아군이 전과를 올리지 못하자 민간 거주지를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 공격이 확대되고 있다. 민간인 사망자가 급증하고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사례들이 빈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참혹한 전쟁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 지를 두고 많은 의견이 제시된다. 대표적인 것이 서방의 강력한 경제제재로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푸틴이 권력을 잃게 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이 환상에 불과하다며 서방은 푸틴을 실각시킬 생각을 접고 타협하는 차선책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16일(현지시간) 두가지 생각을 대변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새뮤얼 그린 영국 킹스칼리지 러시아정치담당 교수가 쓴 “푸틴에게 쿠데타는 못하나? 러시아 엘리트들이 얼마나 고통받느냐에 달렸다”는 글과 우크라이나 출신 경제학자 5명이 쓴 “푸틴 전복은 꿈꾸지 말라. 환상은 우크라이나를 돕지 못한다”는 제목의 글이다. 두 글을 순서대로 요약한다.
서방국 가운데 공개적으로 러시아 정권 교체를 거론하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모두들 제재로 러시아인들이 푸틴에게 들고 일어나길 원한다. 그렇다면 푸틴에게 쿠데타가 가능한가?
푸틴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다. 전쟁으로 무엇을 얻어내든 러시아는 가난해지고 더 불안정해질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더 바짝 러시아에 다가설 것이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들은 미국이나 유럽연합(EU), 중국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더 굳게 가질 것이다.
한편 러시아 내부의 권력구조도 급변할 것이다. 푸틴의 권력이 더 강화되거나 실각할 수 있는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 정치를 바꾸려는 생각에 전쟁을 시작했다. 러시아 경제 거물들에게 매달리는 상황에서 그들 위로 군림하려고 말이다. 푸틴이 성공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유럽 및 미국과 관련을 맺고 있는 부유하고 제각각인 러시아 권력층들 대신, 서방은 미국, 영국, EU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푸틴의 안보보좌관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경제를 국가가 통제하면서 제멋대로이며 예측불가능한 독재국가가 될 것이다.
이 거래가 20년 이어졌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언론 재벌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부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 미하일 코도르코프스키, 모스크바 시장 출신 유리 루즈코프 등이 말을 안들으면 감옥에 갈 것임을 깨달았다. 국가 및 지방 예산과 가즈프롬, 철도회사, 금융기관까지 국영기업 자원을 주무르면서 모두가 자금을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도록 굴렸다.
엘리트들은 러시아에서 엄청난 부를 창출하는 자산을 직접 소유하진 못하지만 이익을 해외로 빼내고 투자하고 빌리고 호화롭게 살 수 있었다. 푸틴은 이 가운데에서 자금 흐름이 이어지도록 하고 이익 분쟁을 관리하면서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을 가장했다.
양측 모두 덕을 본 시스템이지만 갑자기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됐다. 지난 10여년 동안 러시아 엘리트들은 불만이 커졌다. 러시아가 2014년 크름반도를 합병한 뒤 제재를 받으면서 엘리트들을 만족시킬 만큼 돈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푸틴이 엘리트들을 줄세웠다. 보안담당자, 석유기업인을 최우선시한 것이다. 다른 모든 엘리트들은 지위가 격하됐다.
모두들 입이 나왔지만 푸틴에게 도전한 사람은 없었다. 정치적 변화에 따른 승자와 패자가 나뉘면서 누가 승자가 될지 불분명해졌다. 푸틴은 보신을 위해 이들이 연합하는 것을 견제했다. 그러자 엘리트들은 더 많은 돈을 러시아 밖으로 빼돌렸고 토해놓으라는 푸틴의 압박에 저항했다.
푸틴이 서방의 제재에 힘입어 엘리트들을 통제하고 관료들과 지방 정부가 서방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고 안보를 위해 이익을 포기하도록 만들면 엘리트들은 언제든 차버릴 수 있는 월급쟁이요 관리자가 될 것이다. 더이상 강력한 정치 시스템을 지탱하는 구성원이 되지 못하는 이 계층은 러시아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결정권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걱정이 확산된다면 저항이 있을 수 있다. 러시아 엘리트들은 겁에 질리기만 해선 모든 것을 잃게될 것이다. 자신들의 부를 보장했던 푸틴이 그들을 가난뱅이로 전락시킬 것이다.
푸틴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장관들 고위 당국자들과 주요 기업 책임자들에게 사임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말을 안들으면 체포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정치색이 거의 없는 중앙은행 총재 엘비라 나비울리나도 직원들과 경제 엘리트 모두에게 “정치논쟁을 중단하고” 일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으로 분할통치 전략이 뒤집힐 것이라는 점이 푸틴에게는 과제다. 러시아 엘리트 모두가 패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도자를 미는 엘리트층의 쿠데타가 일어나면 엘리트들이 혜택을 누리던 체제를 복원하려 할 것이다. 이들은 제재를 풀고 서방과 경제적 관계를 복원하며 국영 매체를 통해 러시아 국민들에게 푸틴이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설파할 것이다. 절대 민주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패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도둑정치 시스템이 계속될 것이지만 최소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푸틴 전복을 꿈꾸지 말라”
우리 필자들 중 한 사람의 세살박이 아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말을 들을 때마다 전쟁을 일으킨 “나쁜 놈”을 가시돋힌 선인장에 처박고 높은 탑에서 떨어트리고 비행기에서 망치를 휘둘러 때리겠다고 말한다.
폭력은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이의 상상이 주는 유혹은 크다. 아이의 상상처럼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으면 좋겠으니까 말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같다. 암살을 꿈꾸는 사람, 서방의 제재로 푸틴이 무력화될 것이로 말하는 사람, 대중의 소요와 내부 압력을 받아 푸틴이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사람, 내부자의 배반 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만 되면 만사형통이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출신 미국 경제학자들인 우리들은 러시아에서 푸틴이 제거되는 일은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환상에 빠져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암살시도는 거의 성공한 적이 없다. 독일 동료 학자는 “러시아에 당장 클라우스 폰 스타우펜베르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본 스타우펜베르크는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 시도했다가 실패한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다. 푸틴은 히틀러보다 더 편집증이 심하다. 암살에 희망을 거는 것은 순진할 뿐더러 비도덕적이기도 하다.
러시아 대중들은 푸틴에 반기를 들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에선 전방위적인 허위선전이 지속되고 있다. 야당 정치인들은 투옥되거나 망명하고 독립 언론은 폐쇄되고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누구라도 15년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이 제정됐다. 이런 선전에 젖은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푸틴대통령이 옳으며 러시아군이 주의깊게 민간인 공격을 피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사람들은 나치라고 믿는다. 러시아에 사는 우크라이나 가족과 친지들조차 잔혹행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아버지, 아들, 딸, 친한 친구의 말을 믿지 않는다. 시위대는 수백명에서 수천명이 고작이다. 알렉세이 나발니가 투옥될 당시 수만명에 달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마저도 곧바로 경찰에 끌려간다. 무엇보다 푸틴에 대한 지지율이 침공 이후 크게 올랐다.
제재로 사람들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순 없다. 철의 장막 뒤에서 살던 러시아 선조들이 수십년동안 결핍을 견뎠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진실을 알리는 언론이 봉쇄되고 추방되는 속에서 러시아 국민들은 미국이 미는 적과 싸운다고 생각할 것이다.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물질주의보다는 이상주의에 빠져서 높은 물가와 결핍을 기꺼이 감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독립을 지키려고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영웅적 투쟁이 서방을 놀라게 했다. 아이러니지만 러시아 국민들도 우크라이나 국민들 못지 않게 기꺼이 희생하려 한다.
러시아 엘리트들도 푸틴을 이길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서로 경쟁하도록 조정돼 왔다.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 경제 엘리트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엘리트들은 부와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걷는다. 선택된 소수들 가운데 푸틴과 함께 국가보안국(KGB)에서 일한 동료들이 많다. 푸틴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다. 이너 서클에 있는 사람이 반항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며 푸틴을 이어받는 누구라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환상에 빠지는 건 이해할 만한 일이다. 푸틴을 제거하면 서방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구출될 것이다. NATO가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 독일과 헝가리 국민들이 가스값을 더내지 않을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같은 상황을 “최선”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모두 최선의 환상에 젖어 있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차선”을 생각해야 한다. 제약이 있는 가운데 해낼 수 있는 것을 말이다. 러시아는 푸틴의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 푸틴은 굴욕적 패배를 감수하기보다 우크라이나를 초토화하려 할 것이다. NATO는 직접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푸틴이 권력을 지킨다면 미국과 유럽은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현실적으로 상상해보면 다음과 같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도시들을 초토화하고 공포전술로 민간인들을 공격하고 차단하지만 저항을 잠재울 순 없을 것이다. 참혹한 전쟁이 길게 이어져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가 처했던 것같은 상황이 재연될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당사자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결과적으로 푸틴이 목적을 달성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EU와 NATO가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지속하면 러시아의 경제와 군사가 약해져 푸틴은 핀란드, 스웨덴, 옛 소련 연방국가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될까? 상황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정부는 러시아는 물론 서방을 향해서도 보다 나은 대안을 요구해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강조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푸틴은 완강하게 전쟁을 계속하고 있고 NATO는 직접 개입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푸틴을 몰아낼 수 있다는 환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서방의 차선책이 우크라이나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꿈을 꾸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상은 민주주의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천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잘못하는 일이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푸틴의 문제”가 3년이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환상을 접는 것이다. 우리는 진지하고 창의적으로 차선책을 구해야 한다.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 그에 따른 희생은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서 말이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