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소설가 천명관 영화감독 데뷔작… “똥밭서 투쟁하는 남자 이야기”

입력 | 2022-03-18 03:00:00

조폭영화 ‘뜨거운 피’ 23일 개봉
“영화계 또래들 거장 되거나 은퇴, 난 신인 데뷔… ‘인생 재밌다’ 싶어”
1993년 부산 변두리 포구 배경 건달 희수의 생존싸움 그려
날것 그대로 보여준 건달세계 호평… 알아듣기 힘든 부산 사투리 아쉬워




약 30년 전, 서른 즈음에 충무로에 들어섰다. 연출을 해보겠다고 직접 써서 들고 다닌 시나리오는 10여 편. 그를 감독으로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거듭된 실패 끝에 충무로를 떠났다. 이후 20년 가까이 소설가로 살았다. “내가 소설가라고?”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던 소설가의 인생을 살았더니 유명 작가가 됐다. 하지만 영화감독의 꿈은 청춘이 한참 지나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환갑을 목전에 두고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함께 영화계에 있던 또래들은 거장이 되거나 은퇴했거든요. 제가 신인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인생 재밌다’ 싶어요.”

‘고래’, ‘고령화 가족’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천명관(58·사진)이 영화감독이 됐다. 그의 첫 영화 ‘뜨거운 피’가 23일 개봉한다. 김언수 작가(50)가 2016년 출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천 감독은 17일 화상 인터뷰에서 “(김 작가 작품을 택한) 이유는 하나다. 이야기가 너무 재밌으니까. 영화로 만들면 근사하겠다고 생각했다”라고 했다.

영화 ‘뜨거운 피’에서 건달 희수(정우)가 그의 두목 격인 손영감(김갑수)에게 “영감님 밑에서 일하는 대신 성인오락실에 기계를 납품하는 일을 하겠다”고 말한 뒤 이발소를 나오고 있다. 키다리 스튜디오 제공

‘뜨거운 피’의 무대는 부산 변두리 가상의 작은 포구 ‘구암’. 1993년을 배경으로 구암을 장악한 손영감(김갑수)과 그의 수족 희수(정우) 이야기가 주축이다. 건달 생활을 해온 희수는 빚에 시달리며 산동네 낡은 집에서 비루한 삶을 산다. 성인오락기 납품으로 큰돈을 번 뒤 구암을 떠나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러나 영도파 건달들이 구암을 노리기 시작하면서 치열한 생존싸움이 시작되고 희수의 계획도 틀어진다.

언뜻 그간 숱하게 나온 조폭 영화들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천 감독은 “보통 조폭 영화에는 거대한 조직과 검은 양복을 입은 멋진 남자들이 나온다”며 “이 영화는 조직이랄 것도 없이 근근이 먹고사는, 똥밭 같은 곳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라며 차별 점을 강조했다. 배우 정우 역시 “어깨에 힘을 주는 게 아니라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말했다.

천 감독이 영화 작업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2시간 내외의 제한된 시간에 이야기를 몰아넣는 일이었다. 천 감독은 “나는 길게 쓰는 편이니까 소설에선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수 있지만 영화는 시간이 정해진 장르더라. 그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폼이라고는 나지 않는 밑바닥 건달들의 세계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 점은 호평할 만하다. 허름한 세탁공장을 운영하는 건달들 모습은 전에 없이 극사실적이다. 그러나 개연성 없이 튀는 카메라 앵글, 경상도 출신이 들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부산 사투리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천 감독은 “이제 성적표를 받아들 시간만 남았다. 성적이 어떻든 내가 이 과정을 다 해냈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다”라고 말했다.

영화감독의 삶은 계속된다. 그가 2016년 출간한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연출할 계획이다. 하지만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작업을 더 할 생각은 없다. 그의 대표작 ‘나의 삼촌 브루스리’와 ‘고래’는 현재 각각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 중이다. 그에게 연출과 각본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왔지만 거절했다.

“소설을 쓰느라 엄청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이걸 다시 영상화하겠다고 붙잡고 시간을 또 보내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제 소설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